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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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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은 나에게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이었다. 천왕봉 전체는 붉은 깃발, 붉은 함성, 붉은 노래(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빨갛게만 인식되었다)로 뒤덮여 있었다.
무슨 무슨 '통일노조'란 수십 개의 깃발마다 전국 각지의 산업체 이름들이 씌어 있고, 수십명씩 단체로 원정을 온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주먹을 내뻗으며 고함지르고 노래하기를 끝없이 되풀이하였다.']
필자의 졸저 '나의 지리산 사랑과 고뇌'에 실려 있는 글의 한 대목입니다.

그 날짜를 보니 1988년 8월 마지막 주 일요일로 적혀 있군요.
그날 아침 나는 치밭목대피소에서 칠선계곡으로 내려가기 위해 천왕봉으로 향했지요.
써레봉 능선을 따라가던 우리 일행은 탄성을 연발했습니다. 천왕봉과 중봉이 운무와 숨바꼭질을 하는 정경이 너무나 아름다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써레봉으로 갑자기 날카롭고 요란한 함성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천왕봉으로부터 노랫소리와 함성이 뒤섞여 그 아름답던 정경마저 갈갈이 찢어놓더군요.

천왕봉은 일찌기 무장봉기의 무대가 된 적이 있었지요.
여순반란 패잔병들이 '이현상(李鉉相) 부대'가 되어 지리산 문수골에 첫 발을 들여놓은 것이 1948년 10월25일이었지요.
하지만 그보다 5개월 앞인 48년 5월7일 남도부(南道富)의 '함양 야산대'가 천왕봉에서 먼저 무장봉기를 했답니다. 7년의 기나긴 빨치산 투쟁의 서막을 올린 셈이지요.
함양, 산청, 하동 경찰과 우익청년단체들이 그들을 제압하고자 천왕봉을 에워싸는 등 소동이 벌어졌지요.

천왕봉이 어떤 곳인가요? 남한 육지에서 제일 높으니 적어도 이 땅에선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지요.
천왕봉의 거대한 암괴는 하늘을 떠받들고 있습니다. 실제로 하늘을 받드는 기둥이란 뜻의 '天柱(천주)'란 두 글자가 서쪽 암괴에 음각돼 있지요.
남명(南冥) 선생도 '천왕봉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天鳴猶不鳴)'고 노래했지요.
종래에는 천왕봉에 오석(烏石) 표지석이 있었는데, '天鳴猶不鳴(천명유불명)'이란 글자도 함께 새겨놓았어요.

그런데 그 작은 표지석 대신 지금의 표지석은 1982년 6월 초순에 세워졌습니다.
새 표지석을 세우는 날 경남도내 공무원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천왕봉에 올랐지요. 그런데 정작 주인공(?)인 도지사와 함양, 산청 출신 민정당 국회의원은 헬기를 타고 천왕봉에 내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610년 57세의 퇴역 관리 박여량은 천왕봉에 오르기 위해 나막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 산수간을 오르내리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반복훈련을 했다 하지 않던가요.

헬기를 타고 날아와서 천왕봉 표지석을 세우다니요. 그러니 그게 잘 될 까닭이 없지요.
그 때의 표지석에는 '慶南人(경남인)의 氣像(기상) 여기서 發源(발원)되다' 라고 새겨져 있었어요.
그런데 곧이어 난리법석이 벌어졌답니다.
왜 '경남인'이냐는 반발이 거세게 일어났지요.
사실 지리산은 경남 산도 아니요, 호남의 산도 아니지요. 국립공원 제1호로 한국의 산입니다.
그러니 '한국인의 기상'이어야지요. 소동 끝에 '한국인의 기상'으로 수정이 됐답니다.

우리의 조선(祖先)들은 소망과 기원을 위해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 높은 천왕봉에 올랐습니다. 눈비나 바람과 추위도 마다하지 않고 기원을 했지요.
마고(麻姑, 또는 마야부인)가 8명(또는 100명)의 딸을 낳아 8도를 다스리는 무당으로 내보냈다는 무조설(巫祖說)의 시원지가 바로 천왕봉인 때문이지요.
천왕(天王)이란 영봉의 이름도 이곳에 모신 성모상의 별칭을 땄다거나, 그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어서 생겨났다는 설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지금은 천왕봉을 1000년 동안 지켜왔던 성모석상도 강제하산을 당하고 없습니다.
그렇다고 천왕봉의 신령함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요.
우리가 여전히 외경하고 경배해야 할 영봉입니다. 산신제를 지내거나 제물을 올리지 않아도 됩니다.
"천왕봉에 올랐노라"고 목청껏 한번 외쳐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단체 시위나 함부로 떠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한동안 마음을 저미고 머리를 조아려 보십시오. 그러면 천왕봉에 오른 진정한 의미를 깨우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산대천에서 모든 문인과 나그네는 반드시 제물을 갖추어 제사를 올리니, 신에게 고하고 기원하는 것이 모두 그런 것들입니다."
1489년 김일손(金馹孫)이 천왕봉에서 제물 두 그릇과 술을 차려놓고 낭독한 제문인데, 또한 다음과 같이 이어집니다.
"두류산은 수백리나 펼쳐져 호남과 영남의 경계에 진산(鎭山)이 되었으며...이 산에는 반드시 크고 높은 신령이 있어서 구름과 비를 일으키고, 정기를 쌓아 백성에게 복을 내리는 것이 무궁무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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