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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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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새벽 동틀 무렵 해발 1,915미터의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보라. 끝없이 펼쳐진 회색 구름바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 희뿌연 서기(瑞氣)가 어리기 시작한다.
이것도 잠깐, 동쪽 하늘이 오렌지 빛으로 물들면서 휘황찬란한 오색 구름 속에서 진홍빛 거대한 태양이 눈부신 햇살을 부채살 같이 뻗치며 불쑥 치솟는다.
이 장엄한 일출의 모습에는 어떤 경탄사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저 망연자실(茫然自失)할 따름이다.]
나의 고교 동문이자 직장 선배였던 이종길님이 자신의 저서 <지리영봉>에 쓴 천왕봉 일출 모습입니다.

옛 선현들은 천왕 일출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1489년 천왕봉에 오른 김일손(金馹孫)은 [여명에 천왕봉에서 아침해를 맞는다. 햇살에 비친 계곡과 하늘이 온통 구리쇠를 갈아 뿌린 것 같고, 배회하는 모든 것이 차츰 눈길에 안겨드는데, 대지의 모든 것이 개미집 같다.]고 썼습니다.
또 1610년 천왕봉을 찾은 박여량(朴汝樑)은 [온 하늘 아래는 찬란한 빛이 밝게 퍼져 마치 임금이 임어(臨御)할 때 등불이 찬란하고 궁궐이 삼엄하여, 오색구름이 영롱하고 온갖 관리들이 옹립해 호위하는 듯했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천왕일출(天王日出)은 지리산 8경 가운데 제1경이지요. 남한 육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서 맞는 해돋이의 장관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아니, 근년에는 천왕봉 해돋이를 맞이하겠다는 사람들의 극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특히 새해 아침에는 천왕봉의 거대한 암괴가 온통 해돋이를 하려는 사람들로 뒤덮이게 됩니다. 울긋불긋 원색 등산복 차림으로 천왕봉을 뒤덮은 사람들로 아주 거대한 '인간 피라미드'를 이룹니다.
천왕봉의 인간 피라미드, 그 모습이 오히려 천왕봉 일출의 장관에 못지않게 요란스럽고 유별나지요.

새해 아침 천왕봉에서 일출을 지켜보려면 여간한 정성과 각오가 아니면 안 됩니다. 밤잠을 설치다시피 하여 그 높은 상봉까지 오르는 일부터 간단한 문제가 아니지요.
일출을 보려면 깜깜한 어둠을 뚫고 올라야 합니다. 혹한기의 천왕봉은 얼음 덩어리로 냉혹하기 짝이 없지요. 강풍이라도 몰아친다면 일출을 기다리는 시간이 엄청난 고통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체력이나 기상조건만이 문제가 아니지요. 수천명의 해돋이 인파 가운데 천왕봉에 설 수 있는 것은 수백명의 선택받은 사람으로 제한이 됩니다.

2002년 새해 첫날의 해돋이를 천왕봉에서 맞게 되는 사람은 그야말로 선택받은 행운아들이지요. 아니 그 선택된 행운을 차지하기 위해 남다른 고투와 노력, 그리고 인내가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런 관문을 어렵게 거쳐 천왕봉에 서게 된 선택받은 이들은 과연 완벽한 일출을 보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전적으로 그날 기상상태에 달려 있으므로 예측불허입니다.
완전한 일출이란 양곡(暘谷, 동쪽의 해돋는 곳)에서 둥근 해가 제 모습대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말합니다. 구름이나 가스층에 가린 경우, 그것은 아닌 거지요.

완전한 일출을 아무나 만날 수는 물론 없지요. 그래서 천왕 일출은 3대(三代)가 적선(積善)해야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 '3대 적선'이란 말에 천왕봉 해돋이의 참뜻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역경(易經)'에 '積善之家 必有餘慶 積不善之家 必有餘殃(적선지가 필유여경 적불선지가 필유여앙)'이라고 했습니다.
3대에 걸쳐 덕행을 쌓은 집안은 경사스러운 일이 있는 법이요, 그렇지 못한 집안은 재앙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천하의 영산(靈山)인 지리산이 제1경의 진수를 아무에게나 보여주지는 않겠지요.

매년 새해 아침 해돋이를 천왕봉에서 맞이하려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천하 제일의 신령한 영봉에서 소망을 기원하고 싶은 이들이 그만큼 많아진  때문일까요? 또는 남한 육지의 가장 높은 곳에서 새해 해돋이를 맞이했다는 자부심을 갖고자 하는 이들이 늘어난 때문일까요?
어느 쪽이라도 좋습니다. 다만 천왕 일출과 3대 적선이란 말의 진정한 뜻만은 제대로 깨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천왕 일출에 기원한 새해 소망도, 자부심도 한낱 허망한 티끌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거나 말거나 천왕 일출과 함께 새해 아침을 맞으려는 이들이 줄지어 천왕봉으로 오릅니다. 현실적으로는 선택받은 이들이 먼저 천왕봉을 차지하면 나머지 절대 다수는 상봉으로 오르는 산길에서 아침을 맞게 되지요.
그것도 좋습니다. 일출 이후 천천히 올라도 어떻습니까. 일찍이 노산 이은상은 천왕봉 등정 감격을 이렇게 노래했지요.
"보라, 나는 지금 천왕봉 머리에 올랐노라. 구름과 안개를 모조리 다 헤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 되어 하늘 위에 올랐노라!"
천왕봉에 오른 것만도 가슴 벅차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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