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길'은 열려 있어야

by 최화수 posted Jul 12,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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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견성골에서 만난 '아름다운 통나무집'과 '지리산 제1문'이 있는 오도재에 세워놓은 장승들. "아름다운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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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마음먹고 먼 길을 달려갔지만, 옛길 답사는 허사가 되고 말았다.
‘걷고 싶은 길’로 이름난 ‘퇴계(退溪) 녀던길’은 그 입구에서 끊겨 있었다.
처음의 황토 포장도로가 끝나고 오솔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출입금지’ 글자를 새긴 큰 돌이 길을 우악스럽게 가로막고 있었다.

‘퇴계 녀던길 전망대’가 자리한 바로 그 곳이다. 그 앞의 녀던길 이정표에는 화살표가 원래 오솔길과는 엉뚱한 건지산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니까 눈앞의 길을 두고 험한 산길을 엄청 멀리 돌아서 오솔길과 합류할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 기가 막힌다.

오솔길 주변 땅 주인이 길을 막아버렸다고 했다.
안동군이 땅을 매입하려 했지만 여의치 않자 어쩔 수 없이 우회산길을 만든 것이다.
그렇지만 건지산 산길을 따라가면 8㎞를 더 걷게 된다니, 오솔길이 아닌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

청량산에 올랐다가 오후 늦게 녀던길을 찾았던 필자는 부산으로 돌아오는 시간에 쫓겨 녀던길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보다 눈앞에 빤히 내려다보이는 오솔길을 두고 산위로 올랐다가 내려 갔다가를 거푸 반복해야 한다니, 어이가 없는 노릇이었다.

‘퇴계 녀던길’은 시공(時空)이 정지된 자연 속의 자연이다. 선생은 청량산을 오가던 사색의 이 길을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했다던가.
지금은 3㎞ 남짓한 구간만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그 길이 근년에 다시 ‘걷고 싶은 길’로 세상에 알려진 것.

걷고 싶은 길, 그러나 함부로 발길을 들여놓지 말라는 출입금지 표지가 예사롭지가 않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 왜 이렇게 물리적으로 끊어지게 됐을까?
아마도 ‘지리산 둘레길’에서 그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지리산 둘레길 4구간의 벽송사~소나무쉼터 구간에도 ‘통행금지’ 딱지가 붙어있다.

‘지리산 둘레길’ 홈페이지에 그 내용이 공지돼 있다.
‘벽송사~소나무 쉼터 구간은 단체이용객들의 무분별한 농작물 채취 등 주민 피해가 빈번한 관계로 미개통구간이니 통행할 수 없습니다.’

애써 열어놓은 걷기 좋은 아름다운 길에 ‘통행금지’라는 낙인이 찍히는 것이 현실이다.
땅만 파며 평생을 살아온 농민들이 오죽하면 사람이 다니는 길을 막아버리겠는가.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는 법이다. 길을 걸어가는 것만도 좋은데, 왜 농민들이 애써 가꾼 농작물에 손을 대는가.

지리산 주민들이 농작물과 관련하여 필자에게 하소연을 해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애써 가꿔놓은 취나물, 고사리 등을 뿌리째 채취해 간다는 것이다.
신문에 무슨 글이 실리면 도회지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기 일쑤이고, 주변의 산나물 농장 등이 쑥대밭이 되기도 한다고 했다.

지리산 둘레길의 4구간 일부 구간이 농작물 피해와 관련하여 애써 길을 열어놓고도 ‘미개통 구간’으로 묶여 있는 사실이 모든 것을 웅변해 준다.
벽송사 미개통 구간을 피하여 아예 엄천강변을 따르는 별도의 길을 열었다지만, 그것으로 씁쓸한 느낌이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길은 열려 있어야 한다. 걷고 싶은 길은 더욱 그렇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좇아 농작물 등을 함부로 훼손하는 일은 자신의 양심과 양식(良識)마저 더럽히는 일이다.
현지 주민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아름다운 정경을 어지럽히지 말라. 아름다운 길은 늘 열려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