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쓰는 산행편지

by 쉴만한 물가 posted Sep 12, 2008 Views 2685 Replie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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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00 화엄사 출발

아들아, 지리에 들려거든 어두운 새벽에 화엄사계곡으로 들어라.

어둠은 성장이며, 어둠은 겸손이며, 어둠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길이더라.

어둠속에서 내면의 자아와 만날 수 있고

어둠속에서 그리운 이들의 참 모습을 볼 수 있더라.

06:20 노고단 고개

아들아, 나중에 어른이 되거든

더도 덜도 말고 노고단 고개에서 바라 보이는 반야봉만 같거라

너무 멋있으려고 지나치게 높으려고 하지말고

든든하면서도 편안한 좋은 사람이 되거라.

07:25  노루목

아들아, 나중에 벗들을 만나면 노루목에서 뒤돌아보는 봉우리들처럼  정다운 이들로 만나라

낮은이 있으면 높여주고, 혹 높은이 있으면 낮아져서 정다운 이들이 되거라

09:50 형제봉

아들아, 네게 있어 아우가 있음이 아직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지 못할지라도

너희가 서로 웃으며 때로는 다투는 것이 부모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지

많은 시간이 흐르지 않아서 알게될 것이고

저 형제봉이 오랫동안 우애있게 존재하는 것 처럼

너희들의 우애 또한 그렇하거라

10:20  벽소령

아들아,

여름의 비바람을 견디어내고 가을의 전령처럼 벽소령 길목에 피어있는 저 꽃들처럼

좋은 소식을 나누어 주는 사람이 되고

너무 진하지 않지만 오래 기억되는 향기로운 그리움이 되거라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지친 사람들이 쉬어 갈 수 있는 소중한 자리를 남겨두어라

14:25 천왕봉

아들아, 혹 높은 곳에 있을지라도 높이 있다 교만하지 말고

높이 있는 이들을 높이 있다 비난하지 말고

오를 때 흘린 땀과 수고를 생각하고

내려갈 때 허리를 굽혀야 하는 겸손함을 배우거라

그리고 맑고 좋은 날만 기대하지말고

때론 흐리고 비오는 날이

때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더 아름다운 자신을 만들어 준다는 것을 기억하거라.

"시냇물은 바위가 있어서 노래한다"

16:00  치밭목

아들아, 때론 빨리 이루는 것의 성취보다

치밭목에서 느껴지는 원두커피의 은은한 향기를 닮은

천천히 가는 여유를 즐기는 사람이 되거라.

17:30 세재 산행 마무리

아들아, 이제 산행길을 마무리 하면서 너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너의 심성이 세재길의 피곤한 발걸음을 쉬게하는부드러운 흙길처럼

지친 마음들이 네게 와 쉼을 얻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삶의 가을길을 걸어갈 때 석양을 아쉬워하기 보다는

참 좋은 여행을 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거라.

(기차안에서 잠시 뵈었던 카오스님 많이 반가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