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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산행기>지리산산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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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2008년 5월1일
코스  노고단~노루목~반야봉~노루목~노고단
인원  2명



가끔은 아주 가끔은
내가 나를 위로할 필요가 있네

큰일 아닌데도
세상이 끝난 것 같은
죽음을 맛볼 때

남에겐 채 드러나지 않은
나의 허물과 약점들이
나를 잠 못 들게 하고

누구에게도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부끄러움에
문 닫고 숨고 싶은 때

괜찮아 괜찮아
힘을 내라구
이제부터 잘하면 되잖아

조금은 계면쩍지만
내가 나를 위로하며
조용히 거울 앞에 설 때가 있네

내가 나에게 조금 더
따뜻하고 동그란 마음
활짝 웃어주는 마음

남에게 주기 전에
내가 나에게 먼저 주는
위로의 선물이라네


*
이해인님의 詩 '나를 위로하는 날' 全文




4월 어느 날, 혹시나 갈 수 있으려나 불편한 컨디션이지만 그동안 잘 조리하면
갈 수 있나싶어 예약하느라 애만 썼지 느린 컴퓨터 덕분인지 산장예약을 실패했다.
지리산이 나를 거부한다.

어깨 통증 때문에 정형외과에서 한의원으로 요가에 헬스에 철봉에..
거기다 이비인후과에... 다시 정형외과 그리고 신경내과... 통증크리닉까지..
날마다 아니 오전, 오후로 나뉘어 병원으로 출근을 했음에도 호전은 커녕 점점
기진한데다  어깨 부위에서 등과 목..그리고 왼팔등 나의 신체 중 왼쪽 거의가
불편하다.
자연히 누구를 만날 수도.. 만나자는 말도.. 할 수가 없다.
회사는 나이롱으로 출근하니 이것 또한 마음이 편할리 만무...
당연 산은  멀어져만 가고  내 생활의 평형이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지난 주 일요일.. 저녁무렵
무료한 시간으로 낮잠과 책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조용한 전화기에
도일이의 번호가 뜬다.
- 뭐해요 누나?
도일이는 지난 해 11월 지리산 종주 중 만나 얼떨결에 종주에 동행하였기에
공통 대화인 지리산을 빼면 할 말이 없다.
- 그냥 있다. 아프니 어딜 가지도 못하고 겨우 산자락만 볼 뿐이다.
녀석은 심심하였는지 심통인지 지리산 타령을 한다.

슬슬 나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 우리 지리산 가까?
- 정말 갈까요?
- 5월1일 지리산 주능선 열리니깐 지난 해 가다 만 반야봉 올라가 보자!

이래서 반야봉을 가기로 하고도 밍기적..
혹시 모를 컨디션 때문에 출발하는 날까지 조용히 지내다가 드디어 말문을 열었다
- 인섭아, 륜아, 대희야 지리산 안가니?
인섭이는 다리의 물리치료차 푹~ 쉬는 중...
륜이와 대희는 5월10일 바래봉 철쭉산행에 비박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오후에 들여다 본 지리산커뮤니티에는 유키님의 '날랜걸'이라는 제하의 글이
나를 사로잡아 버린다.
축 쳐진 채 갈등하는 나의 마음에 파란 불이 켜졌다.
일단 출발하고.. 가면서 생각하자~
컨디션이 나쁘면 노고단에만이라도 가자~
아니지 돼지령에서 바라보는 능파만이라도..
조금 더 좋으면 임걸령까지만~

도일에게 과일을 주문하면서 참외는 꼭 한 개만 사라고 당부했다.
내 배낭을 책임져 줄 녀석에게 많은 먹거리는 사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박 산행인데다 기상청 예보로나 지리산관리소 전언에 의하면 비올 확율은
20%미만이랜다.
당연 배낭을 가볍게 꾸려도 되겠다 싶지만 그래도 지리산이 아닌가..

아침은 가다가 휴게소에서 먹으면 될 것이지만 그래도 노고단 산장에서
잠시 쉴 터이니  남들 먹는 것 구경만 하면서 침 꼴깍이면  치사한 넘 될까
싶어 커피라도 끓이려고 코펠과 버너를  챙기고 혹시 몰라 라면을 3개를 넣었다.
도시락으로 3.5컵 분량의 밥을 준비하고.. 반찬으로는 김치와 멸치볶음과
돼지고기제육볶음을 넣었다.
김치와 멸치볶음은 얻은 것이고, 제육볶음은 날씨 때문에 상할 염려가 있으니
간을 세게 하고 푹 끓여서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였다.
이제 맛이 있고 없는 것은 팔자소관(?)이다.

드디어 밤 10시 57분 지리산 가는 열차가 내 앞에 선다.
내일이 '근로자의 날'이어서인지 지리산 인파라고 생각되는 인원이 많은 편이다.
대개는 무리지어 출발하고 오늘도 멋적게 혼자 오르지만 전주까지만 가면
합류할 도일이가 있으니 떼지어 탑승하는 산님들이 하나도 안부럽다.

23시10분경..
내가 탄  객차안은 용산역에서 출발한 산님들의 배낭으로 내 배낭 얹을 자리가 없다.
아직 남은 다른 자리의 선반에 내 배낭을 얹으려다 실패~
내 왼쪽 어깨의 지독한 통증이 시작되었다.
가뜩이나 선반이 높아 올릴 때마다 온 힘을 다해야 하는데 오늘은 통증으로
종주시보다 가벼운 배낭조차 선반에 얹지 못하다니..
옆 좌석에 있던 산님이 물끄러미 보다가 도와주겠다니 염치불구하고
-예스~

도일이에게 영등포역을 출발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잠을 청해도 주위의
시끄러움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이러다가 또 밤을 샐 것 같지만 대책을 강구해도 열차안은 북새통이다.
수원서  탑승한 산님의 숫자가 만만찮은데다 평택에서까지 합류하더니
어느 산님이 산만한 배낭을 가지고 이리저리 궁리하다 어떤 작은 배낭하나를
빼고 자신의 배낭을 얹고는 그 작은배낭을 내 머리위에 얹으려 노력하는데..
기차가 아무리 얌전히 간다해도 선반위에 동글한 배낭은 안정감이 없어 보인다.

에고~
저 배낭이 떨어지는 날에는 지리산은 고사하고.. 살아남기 힘들 것 같다는 불안감에.. 그 매너 꽝인 아저씨에게 충고를 했다.
- 선반위에 배낭이 안전해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곳으로 옮기면 좋겠다..
결국 그 작은배낭은 본래 있던 선반의 반대편에 얹어져서 갔는데.. 배낭주인이
잘 찾아 내렸는지..
- 절에서는 대중이 많은 날.. 아무리 바빠도 남의 신발을 신지 말라는 규칙이 있다.
   이유는 한 사람의 급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전 대중의 신발이 바뀔 염려가 있다는
   것이다.

기차는 서대전을 지나고.. 익산을 지나고.. 전주에 도착했다.
도일이.. 출구에 떡 버티고 있으니 6개월만에 재회다.
전주역에서 자판기 커피 한 잔씩을 마시고 지리산으로 향했다.
전주 시내도 조용하고..
달리는 국도에 차량이라고는 우리 뿐이다.
고도가 높아지는지 한기가 든다.

어디즈음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물줄기에 놀랐는데 조류독감 소독이란다.
뉴스에서만 보는 전염병에 대한 공포가 현실로 느껴지니 섬칫하다..

지리산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딱 두 번 끊겨지는 이정표 덕분에  헤매기도 하였고
도일이는 그 새벽에 첫 번째 입산자일 것이라는 설레였다는데 구비 구비 도로를
쏜살같이 내려오는 택시를 보자 그 부지런함에 감탄사를 연발한다.
성삼재에 차를 주차하고.. 노고단을 향해 도란도란 숨 차지 않은 속도로 오른다.
새벽하늘에 옅은 별무리와.. 음력 삼월 스무닷세의 노오란 그믐달님이 유난히
돋보인다.
본래 보름달보다 눈썹처럼 생긴 그러니까 그 모냐.. 음~
어릴 때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본 '푸른하늘 은하수~' 거기 왼편 그림 같은...
쪽배 모양이다.

금새 날은 밝고 몇 달새에 질러가는 나무테크를 설치한 곳도 있고..
오르다 가족산행 중인 산님들과 인사도 하고..
막 코재를 지나는데 꽤 근사한 산님이 화엄사에서 올라온다.
혼자서 화엄사를 올라온.. 대원사까지 진행할 산님이다.
지리산이 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따라서 초중등학생들의 종주 참여는  평균년령을 낮추는데 기여도가 높다.

노고단대피소에 도착하였는데
생각보다 적은 산님들이 식사를 준비하거나 마치고.. 부지런히 채비를 한다.
당초 휴게소에서 아침을 먹으려던 것이 문 열린 곳이 없으니 배낭에 코펠과
버너가 빛을 발할 수 있어 흐뭇하다.
도일이는 뭐든 먹을 것만 보이면 방글방글 웃는다.
철도 삼킬 수 있다는 나이가 아닌가!
작은 코펠에 라면 세 개를 끓이고.. 후식으로 커피를 마셨다.
아침을 먹느라 노고단 일출은 포기했다.

느긋하게 올라 선 노고단.. 오늘은 바라보기만 할 지존인 천왕봉이 저 멀리
건너편에 마주하고 바짝 코앞에서 오늘의 목적지인 반야봉이 제법 웅장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아직 노고단은 -출입금지- 팻말을 붙인채 닫겨 있으니
이리저리.. 사진을 찍으며 모자가 날아갈까 자켓 후드를 덮어 쓴 체세찬 바람을
온 몸으로 맞아도 기분은 좋다.

자 이제.. 도일이와 노고단을 내려서며.. 오늘의 반야봉까지를 유쾌하게 시작한다.
느긋한 마음이니 지나가는 산님 한 사람, 한 사람을 놓치지 않고 볼 수 있다.
본래 느린데 오늘은 더 천천히.. 여유롭게.. 바쁠게 없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초등학생 둘을 데리고 종주중인 가족 두 팀과..
혼자 산행하는 산님들 중 유난히 눈에 띄는 약수동 산다는  패션이 눈에 띄는
여성산님과 일행을 이루고... 왜 혼자냐는 질문을 했더니..
당초는 여럿이 예약을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번에도 또 혼자 출발했단다.
화사한 자켓과 모자로 지리산이 환하다.
지난 화요일.. 모자 하나를 사려고 백화점에 갔다가 칼라가 너무 화려하여
포기하고 만  모자 스타일인데 내게는 어울리지 않던 모자가 약수동 산님에게는
꽤나 어울린다.
젊은 이유다.
젊다는 것은 좀 건방져도 식상하지 않은 상큼함이 있다.
나이 들면서 가장 두려운 것은 '나이 값'을 하는 것이다.
'나이 값'이란 나와 남들에게 어색하지 않는 모습으로 표현되어야 할 일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것이 내 젊은 날에 중년인 언니와 오빠에게 요구하던 일이었다.
불과 몇 년전까지만해도 미니스커트가 청바지가.. 스니커즈가 어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음은데.. 이즈음은 자꾸만 움츠려지는게.. 젊어보인다는 말이
오히려 부끄럽고 어색한 것은 '젊어보인다'는 말이 자칫 '철 없어 보인다' 또는
'어울리지 않는다' 라는 말로 바꾸어 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기성세대로의
합류하는 탓일 것이다.

산길은 바싹 말라 있었고 먼지가 날린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가 걷기에 안성마춤이다.
이젠 눈에 익은 나무며 돌맹이며.. 내림길 오름길...
익숙한 것에 대한 편안함이 있다.
그 길에 내가 맨 처음 신세 진 돌의자가 있다.
도일이에게 그 의자에 대한 역사를 말해 주고 제대로 한 컷을 찍었다.
그간 동행이 있어도 없어도 여유롭지 않은 산행이라 바쁘기만 했었는데..
어깨가 아픈 내가 배낭을 맨 체로 휴식을 취하기에 딱 맞는..

산길은 편안하다.
뒤에서 바쁜 산님들이 거칠게 걸어도 전혀 불편함이 없다.
내가 바쁘지 않으니 바쁜 산님들을 이해하면 그만인 것을..
인심이란 이런 것이다.
나와 남을 가를 때.. 나의 형편에 따라 분별도 경중輕重이 있다는 것을...
따라서.. 모든 것은 나를 기준으로 일어난다.
오늘은 가능한 나의 모든 기관을 쉬게 하리라..
그래서 오고 가는 길에 분별심을 최대한 줄여보자..
그냥 지리산에 묻혀 보자..
이 넓고 거대한 산에 와서.. 너와 나를 갈라서 어디에 쓸 것이며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하지만 행동은 금새 금새 즉각 반응으로 나타난다.
이 산님은 어떤 스타일이구나~
저 산님은 저렇구나~
눈에 보이는대로, 귀로 들리는대로, 향으로 말로..몸으로, 생각으로 끊임없이
일으키는 나의 분별..

하지만 즐겁다.
지리산이라 즐겁다.
그들이 나를 몰라도, 내가 그들을 몰라도.. 우린 이 산길에서 절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그 자유가 나를 자유롭게 한다.
스스럼없이 어디까지 가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답을 받는다.
그 질문에는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호기심도 아니다.
그저 지리산을 걷는다는 반가움에 말을 거는 하나의 인사에 불과하다.
또한 내가 가지 못하는 구간에 대한 시샘이 아니라 내가 걷지 못하는
구간을 대신 걸어주는 고마움이다.

돼지령에서 한참을 머무르며 능파를 바라본다.
도일이는 벽소령에서 세석 넘어가는 무명봉에서의 능파와 함께 겪은 놀라움을
재현하여 지난해 11월의 종주를 기쁘게 떠올린다.
우린 여기를 걸으며 저쪽을 그리워한다.
과거심 불가득, 현재심 불가득, 미래심 불가득...
존재하지 않는 과거에 매어.. 현재의 지리산을 잊는다.
가지도 않을 저 앞의 주능선을 헤아리느라 현재의 지리산을 잊는다.
가장 중요한 현재를 팽개쳐놓고..
그러나 어쩌랴.. 지금보다 저 앞에 펼쳐질 풍광이 궁금한 것을...

임걸령에서 500mm의 물통에 샘물을 반쯤 긷고..
놀며 놀며..
흐릿한 지리산이지만..  비가 오지 않는 것이 큰 다행이라며 흐뭇해 한다.
노무목까지가 오늘 가는 코스 중 두 번째로 난코스에 속한다.
약수동 산님은 이 지역이 힘이 드나보다.
특별히 기억하는 것으로 보면...

나는 화개재에서 연화천 코스가 가장 힘들었던 것 같다.
언제나 그 구간에서 시간 안배를 잘못하여 숙소배정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늦어도 상관없다. 전주발 용산행 18시29분 기차만 탈 수
있으면 되니까..
- 나중에 시간이 모자라 한 시간에 3km씩 진행해야했다.^^

노루목에서 약수동 산님과 인사를 했다.
도일이의 아쉬움은 커 보인다.
녀석은 약수동 산님과 일행을 이룬다면 다시 종주를 해도 될만큼 지리산에
들떠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님을 나는 안다.
지난 해 여기서 도일이와 인사를 나누다가 얼떨결에 나를 따라 종주를 해 버린..
에피소드가 있기에 더욱 그렇다.

배낭을 두고 갈까말까 고민하다가 안전의 문제도 있고 점심 식사는 반드시
반야봉에서 한다는  약속을 하였기에 무거움이 느껴져도 그냥 오르기로 했다.
오름길 1km
그러나 나는 안다.. 이 반야봉 1km야말로 내가 가장 기쁜 마음으로 오를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을..
반야봉이 아닌가!
혹시 모른다.
이 반야봉을 오르다 나의 지혜가 충만해져.. 머릿속이 하얗게 되는 것을 경험할지도..
행여 그런 행운이 오겠나마는 그것 또한 예측하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오늘 일이 나의 근기가 점점 극점에 도달할 어느 날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참!
도일이에게는 얼레지를 보여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그 수줍은 꽃은 노고단을 지나고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고 임걸령 샘터를
지나도록 코빼기도 보여주지 않는다.
잎 조차 볼 수가 없다.
이상한 일이다.
날씨는 이렇게 따사롭고..
분명 <유키>님의 저 쪽 산일기에서는 얼레지가 피었다고 했는데...

지난 해 꼭 이맘때 여기를 지나갔느데.. 연화천 가는 양 옆 나무데크 사이로
무리지어 핀 얼레지의 사열을 받았는데..

대신 진달래가 온천지로 붉게 피어나고 있었다.
몇 잎 따서 입에 물로.. 도일이를 부추겨 꽃잎을 땄다.
어떤 산님은 철쭉이라고 우기는 통에 그 증명을 하느라 힘을 빼기도 하였지만
대체로는 덥고.. 바람불고 반야봉 오르는 길은 지루하지도 지겹지도 지치지도
않는다.
단지, 오름길 1km의 거리감각이 없을 뿐이다.
앞서 간 산님들은 별로 없는 듯하고..
한산한 반야봉을 향해 한 발, 한 발 오른다.
절대 나의 두 발 아니면 이 산을 올라 갈 수 없는..
이 순간 오직 충실해야 할 오름짓이다.

드디어 철계단이 보이고.. 제법 걷기에 좋은 비단길이 나오고..
하늘은 점점 밝아지도.. 반야봉 정상이 다가온다.
1,732m의 반야봉..
지존인 천왕봉 보다 183m나 낮으면서도 절대 가치를 지닌 반야봉이다
한 낮의 반야봉 오르는 길은 덥고 지친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한발, 한발..
어깨 통증이 더해가지만 나의 반야를 향한 속세 욕심을 지천하는지 반야봉은 멀다.
한 번 속고, 또 한 번 속고..
진실로 다가 온 반야봉은 텅 빈 공간으로 나를 맞이해 준다.

반야봉이다.
돌멩이를 깨어 일부러 편편하게 만든 넓직한.. 정상에서 내려다 보는 지리산은
마치 연꽃의 꽃술 부분이 아닐까 한다.

도일이가 묻는다.
천왕봉과 반야봉.. 무엇이 다른가.......라고
천왕봉은 허적허적.. 왠지 허망함을 느끼지만 반야봉에 오를 때의 첫 소감은
그저 환하여.. 막힘없음이 좋았다라고 설명을 해 준다.
어찌 내 마음을 다 전할 수 있단 말인가...
도일이의 반야봉, 도일이의 지리산과.. 나의 반야봉 나의 지리산은
주관의 차이가 있음에 결코 이해하지만 같은 시선이 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그래서 강요하지 못한다.
다만 나의 반야는 이렇다라는 것을 설명을 할 뿐....

반야봉은 뜨겁다. 햇볕 한 점 가릴 차양막도.. 나무그늘도 없다.
고스란히 하늘에서 내려 쪼이는 빛을 받아 도심 콘크리트 도로에서나 느끼는
후끈함으로 달아오르고 있다.
사진을 찍고 천왕봉을 바라보고 노고단을 향해 서보고..

건너편 능선까지 뱅글뱅글 돌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아 놓아
느긋하게 자리를 알아 보러 간 도일이가 그늘 진 곳을 찾았다고 한다.
녀석을 데리고 오길 정말 잘 했다.
나는 그냥 필요한 것을 말만 하면 되었다.
동행이 있다는 것이 이렇게 좋다.
특히나 오늘은 도일이가 특별히 에스코트를 해 준다니 더욱 고맙기 그지없다.

점심상을 보고.. 시원한 곳에 식사를 마칠 즈음...
왠 산님이 우리 곁을 지나는데.. 어디서 오시냐니까 이끼폭포를 지나 묘향대를
거쳐 오는 중이라는데 비지정등산로인듯 하여.. 묘향대를 가지 못하는 아쉬움에
얼마나 걸렸냐니까 03시에 출발하였다는데 반야봉이면.. 도체 얼마나 걸린 것일까..
내 실력으로는 묘향대 가기 어려울 것으로 보여지니.. 그냥 입을 꾹 다물 수 밖에..

점심을 먹고 정리를 할 즈음에 아랫마을에서 오셨다는 산님 두 분이 아래에
자리를 잡는다.
몇 마디 거들다가 아예 자리를 옮겼다.
연배가 비슷하신 두 분은 아마 직장 상하관계로 보이는데 한 분은 서울에서
출장중이라고 한 분은 현지인으로 보인다.
한 분이 주로 식사를 준비한 것 같아 보이고 서울양반은 쑥떡을 내 놓는다.
도일이가 200mm의 소주를 몇 잔 들이켰는데..
아고나~
이 분들의 술이 그게 전부였다는..
다행이다 맥주 100mm정도만 받고는 사양한 것은...

우리가 돌아갈 때는 노고단을 들려 갈 것이라고 하니 주능선에서 노고단 가는
지름길이 있다는데..
하산할 때 보니 흔적도 없으시다.
느린 나를 떼어놓고 가신 것이 분명하다.
아까 식사때는 다음 종주에 함께 가면 좋겠다는 희망을 이야기 하시더니
내가 만든 제육볶음을  한 점 드시고나서 틀림없이 마음이 변한 것 같다.
솜씨를 괜히 보여드렸나 보다.^^

반야봉에서 한 번 더 둘러보고..
관광버스 한 대 분량의 대구 산님들에게 반야봉을 넘겨주고.. 하산한다. 13시40분..
기온은 높고 햇볕을 가릴 나무그늘도 없다.
그냥 걸을 수 밖에..
이제 진달래는 피기 시작했지만 낮과 밤의 기온차 덕분인지 저 많은 진달래가 과연
여름이 오기전까지 피어 줄지  궁금하다.

반야봉을 하산한지 40분만에 노루목으로 돌아왔다. 14시20분...
삼도봉까지 진행하려고도 했지만 이제 돌아가는 시간이 빠듯하게 보인다.
노루목에서 잠시 쉬었다가 지나가는 산님들을 거슬러 걷기 시작했다.
이 시간에도 한참 주능선을 따라 걷는 산님이 많다.
허긴 날씨는 따뜻하고 비가 올 것 같아 보이지 않고.. 산더미만한 비박배낭을
맨 산님들의 행진은 지리산에서만 보는 진풍경이다.
그들은 산장이 아이어도 어디든 머물 수 있으니 시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오는 길에 보는 조망은 오전보다 훨씬 모자란다.
아예 반야봉마져 뿌옇다.
드디어 본전 생각이 나기 시작했다.
반야봉까지  들으라고 고래 고래 소리를 질렀다.
기왕이면 한 번 보여 달라고..
치사하고 또 치사하다고.. ㅡ.ㅡ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하고 아까웠다.
어떻게 찾은 지리산인가..
벼르고 별러서..
아픈 어깨에.. 통증에.. 구토와 어지럼증을 감수하면서 오른 산이다.
병원 선생님에게 비밀로 왔다.
혹여 지리산 간다고 하면 다음부터 치료거부를 할 지도 모를 일이다.
선생님들은 묻느다.
- 뭐하다 어깨가 지경이 되었소?
무슨 험한 일을 하기에 이 나이에 몸이 이 모양이냐는 질책이다.
그래서 진통제는 처방전을 받지 못하고  약국에서 사정사정하여 몇 알 구했을
뿐이다. 하지만 약을 먹지는 않았다.
그냥 버텼다.
아니다, 버틸만 했다. 지리산이니까..

대신 도일이가 배낭을 앞 뒤로 메고 간다.
녀석에게 미안하지만 돌아오는 길의 어깨는 생각외로 통증이 심하니
그냥 미안하기로 했다.

임걸령에서 물을 긷기로 했는데 도일이가  물을 포기한다고 하길래
반야봉과 샘물을 긷는 것 말고 이번 지리산행이 의미가 없음을 강조하여
물을 긷게 했다.
도일이는 2리터를.. 나는 1500mm를 길었다.
대신... 각자의 배낭을 메었다.
도일이도 오늘 산행이 즐겁기는 해도 컨디션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는다.
- 누나~ 점심을 먹어도 간식을 먹어도 배낭 무게가 같다.

걸음도 빨리해야했다.
노고단까지 17시 전에 도착해야는데..  속도가 나지 않는다.
오전에 너무 느린 산행을 한 탓이다.
하지만 후회해도 흘러간 시간은 보상 받지 못한다.
그냥 빨리 걷는 수 밖에...

노고단을 포기하고 짝퉁 노고단에 도착한 시간은 17시 정도..
다시 배낭은 도일이에게 넘기고 허적 허적 걷는다.
노고단 대피소를 휙 지나치고.. 넓은 도로에서 질러가는 돌계단과 나무데크로
걸음을 빨리해도 전주까지 가서 기차를 탈 시간은 늦었다.

성삼재 주차장에 도착한 시간이 17시 50분...
전주 승차를 포기하고.. 어떻게 상경할 것인가 궁리하다가 구례구역에서
승차하면 어떨까...
18시20분 구례구역 출발시간이란다.
도일이가 자동차에 속도를 가한다.
길도 모르는 도일이가 무섭게 내는 속도 덕분에.. 안전벨트 꽁꽁 메고^^
우여곡절 끝에 구례구역에 도착했는데..
무슨 역이 정말 순천가는 길 어딘가에 있다.
참 이상한 곳에 역을 세웠다. 왜 그랬을까...
(공사비 때문이었나?)

내 짐 일부는 도일이 배낭에 담겨 있는데 다음에 받기로 하고 기차를 타기
위해 달렸다.
숨을 몰아쉬고 있는 사이 기차가 플렛폼에 서서히 도착...
도일이가 내 배낭을 실어 준다고 함께 기차에 올랐다가 미처 내리지 못하고
출입문이 닫겨 버렸다.
황당.. 난감~
승무원아저씨의  입장권 없이 역 구내에 들어온 일과 열차에 승차하면
안되는 조항등을 들추며 추궁 받았다.

철도청 고위 간부처럼 보이는 아저씨의 친절한 설명으로 곡성에서 내려  
구례구역에 주차한자동차로 돌아가기로 합의하고 보니 도일이가  또 다시 자동차로
돌아가는 험난한 일정이 남아있다.
이 무슨 우연의 일치인가..
지난 해 11월에도 나를 따라 나섰다가 화엄사에 주차한 자동차를 회수하기
위해 겪은 우여곡절도 만만찮았는데...
도일이와 지리산에 자동차 회수에 따른 징크스가 생겨버렸다.

잠시 당황했던 도일이가 기차가 섬진강을 끼고 달리자  녀석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다
- 섬진강을 바라보는 짧은 기차 여행도 나쁘지 않다.
도일이와 제대로 된 밥을 한끼도 못 먹고 그대로 헤어지는 것이 아쉬웠고
미안했지만 운명이려니..  했다.
곡성에서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도일이가 내렸다. 6시 35분...
녀석은 한 시간 뒤에 있는 여수행 기차를 기다려야 했으니.. 나중에 생각해도
재미있는 사건 중  하나로 기억될 것이다.

도일이가 곡성에서 내리고 나니  안정이 되었는지 차창 밖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너른 들판에 이제 막 파랗게 오르는 5월의 신록이 싱그럽다.
어디쯤에선가 잠깐이지만 목화꽃을 본 것 같기도 하다.
서서히 내리는 어둠과 함께 힘들었지만 행복한 나의 지리산 산행도
끝나가고 있었다.


*
사진은 이번 지리산을 동행한 도일군입니다.

**
사실 어깨 통증으로 힘겹게 걷고 올랐습니다.
동행한 도일이에게 많이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왕복 약 19km를 걸어서인지 돌아오는 산행보다 종주산행에 대한
아쉬움이 컸지만 임걸령 샘물을 긷는 것으로 위로 되었습니다.


  • ?
    구례사람 2008.05.04 23:53
    충효예절의 양반고장인 구례에서 전라선 철도를 건설할 때 구례를 통과하지 못하게 해서 지금의 자리에 역이 세워졌는데 구례가 가까워도 행정구역상 순천땅이라 '구례역'이라고 하면 순천사람들의 민원이 들어올까봐 입구(口)자를 써서 구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뜻으로 '구례구역'으로 붙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
    유키 2008.05.05 17:11
    6개월만에 한 번 만난 도일군....
    육개월간의 못다한 회포를 풀라고 지리산 마고할매님이 입김을
    불었나 봅니다. ㅎㅎ
    일이 이쯤 되면 일년 후 아니 삼년후에 만나도 늘 그 자리에서
    늘 보아왔던 벗처럼 친근하지 않겠는지요.
    지리산이 맺어준 벗은 지리산을 닮는것 같습니다.

    "또한 내가 가지 못하는 구간에 대한 시샘이 아니라 내가 걷지 못하는
    구간을 대신 걸어주는 고마움이다." 본문에서.
    지리산길을 걷는 사람은 이렇게 멋지다니까요. ㅎㅎ

    이안님께서 쉬어간다는 그 돌의자와 돼지고기 제육볶음 맛이
    아주 매우 궁급합니다.
    깊은 사색이 있는 멋진 산행기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어깨의 완쾌를 기원드리며. 어린이날에.
  • ?
    moveon 2008.05.06 00:01
    지리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 모두 낯이 익는지 몰라 잉!!!!!전생에 봤는 감. . .몰라유. .
  • ?
    섬호정 2008.05.06 11:12
    이안님! 참 대단하신분 존경하고싶어요
    산행도 힘들었으터..
    긴 글로 세세히 적어 올려주시니 함께 그 산행길 동참한 기분입니다

    구례口역'내력과 지리산 마고할매님 입김으로 5월을 연상시켜주는 유키님의 센스 멋진 발상에 감동입니다
  • ?
    슬기난 2008.05.06 22:05
    주능선 풀리기 기다려 휭하니 다녀오신
    발걸음따라 같이 반야봉에 올라봅니다.
    지난 1월 시산제때는 어찌나 날씨가 선명하던지,.,
    뿌연 시계대신 예쁘게 치장한 진달래의 수줍은 마중에
    아쉬움을 달래 보아도 되겠습니다^^*
    지리정기 받으시어 아프지 마시고 자주자주
    발걸음 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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