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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사랑방>삶의추억

2021.01.10 16:22

 '나는 자연인이다'

조회 수 2182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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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자연인이다'

 

  양(梁) 나라 무제(武帝)는 친구 도홍경(陶弘景)이 구곡산(九曲山)에 은둔하자, 산중에 무엇이 있어 나오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도홍경이 시로 대답했다.

'산중에 무엇이 있느뇨(山中何所有) 산마루에 흰 구름이 많소이다(嶺上多白雲). 그러나 다만 스스로 즐길 뿐이며(只可自怡悅) 가져다 드릴 순 없소이다(不堪持贈君).' 

 요즘은 TV에서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프로그램을 자주 본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서다. 나는 사람의 몸과 마음을 치유해주는 가장 뛰어난 명약은 자연이라 생각한다. 30년 전 일이다. 20년간 모 회장 비서로 있다가 물러날 때 마음의 상처가 적지않아 나는 한동안 사람 만나지 않던 때가 있었다. 그 당시 일주일에 한 번 속초 모 대학 강의를 다녔는데, 신기하게도 서울 벗어나면 스트레스가 없어지고, 서울 오면 스트레스가 살아나곤 했다. 새벽에 양수리로 차를 몰고 가면 물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가 마치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성화(聖畵)처럼 신비스러웠다. 제 상동리 고갯길 박인환의 시비 앞에 차를 세우고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향기를 맡을 때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박인환의 시가 떠오르곤 했다. 원통골 이름 모를 계곡에 차 세우고 물 위로 점프하는 피라미의 그 싱싱한 생명력의 비상을 보면 마음이 온통 자연에 몰입되어, 세상 스트레스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서울로 돌아와 서울 하늘 덮은 스모그 보면 스트레스가 다시 살아나곤 했다. 그때 나는 자연이 마음을 치유해주는 가장 좋은 명약이고, 우리 병을 고쳐주는 의사요, 간호사란 걸 깨달았다.

  그 후 나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 밤에 은하수 볼 수 있는 곳, 아침에 야생화 향기 맡을 수 있는 곳에 가서 사는 것이 꿈이 되었다. 그래 나는 자주 TV 틀어놓고 <자연인> 프로그램을 보곤 했는데, 그런데 세상사 맘대로 되는 건 아니다. 어느 날 나는  아내가 나를 와싱톤 어빙의 소설 주인공 <립반 윙클>처럼 이상한 사람으로 본다는 걸 깨달았다. 저 첨지가 저러다 언젠가는 별거 선언하고 지리산이나 설악산으로 갈란다고 나올까 봐 겁나는 모양이었다. 사전 예방 차원인지 어쩐지는 모르지만, 뉴스 본다며 가차 없이 내가 보고있는 챈넬을 돌려버리면서 끈질기게 사람 괴롭히는 텃밭 잡초처럼 굴더니만, 어느 날 엄숙하게 선언했다. 앞으로 자기 앞에서 절대 그런 프로그램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기사 명동에서 태어나 서울 밖이라곤 외가가 있는 부평 가본 것이 전부인 아내로선 그게 당연한지 모른다. 

 

 그러나 당하는 쪽은 고통이 많아, 오랜 박해의 시간 끝에 나는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 끌고 애급 탈출한 모세처럼, 하늘로부터 하나의 계시를 받았다. 그건 '태양이 지구 주변을 도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태양 주변을 돈다'는 코페르 닉스적 발상의 전환이었다. 나는 '내가 산에 갈 것이 아니라, 산을 내 옆에 끌어온다'는 지동설 비슷한 걸 발견한 것이다. 그건 도시 속에서 전원의 꿈을 만족시키는 매우 혁명적인 발상이다. 

 내가 산을 도시로 끌어오기로 하자 몇 개의 장점이 발견되었다. 우선 토지 구입 부담이 없었다. 양수리나 여주에 땅 살 돈 마련할 걱정이 없었다. 설악산 지리산도 그랬다. 또 내가 시멘트 아파트 5층을 험준한 산속 바위굴이라 생각한 순간, 모든 건 저절로 해결되었다. 엘리베이터 타고 땅에 내리는 순간 거기 넓은 화단이 있다. 나는 거기다 장미 심고, 백합 심는다고 누구도 반대하지 않는 걸 발견했다. 농약 필요 없고 비료 필요 없다. 그건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관이다. 삽으로 땅 갈아엎는 수고도 없다. 수시로 찾아와 밭을 쑥대밭 만드는 멧돼지도 없다. 5층 바위굴이 신통한 건, 여름엔 계곡 찬바람보다 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온다는 점이다. 겨울엔 쇠꼭지에서 온천수처럼 뜨거운 물이 한정없이 쏟아지는 점이다. 

 이번 봄에 나는 흐뭇한 경험 하나 했다. 청산이 아닌들 어떠리. 화단에 백합 구근 스무 개 심었더니 꽃이 향기 풍기자, 출근하던 한 젊은이가 '할아버지 수고하십니다' 깍듯이 인사 던졌다. 꽃 사진 찍던 젊은 새댁도 환하게 웃으며 목례 던졌다. 그래 나는 내년 봄에 화단 품격 높이는 목단도 심을 예정이다.

 

 두 번째 장점은 먹거리에 대한 자연인 사상을 터득한 점이다. 사람은 어차피 먹어야 산다. 그런 면에서 공기 좋은 산속에서 바위틈에 흘러가는 물 먹고, 무공해 산채 캐서 먹는 건 건강에 좋긴 좋을 것이다. 그러나 도시에도 마트란 곳에 가면, 제주도 화산암반수 삼다수 있고, 백두산 천지에서 실어온 백산수 있고, 지리산 생수 아이시스 있고, 심지어 프랑스에서 공수해온 에비앙도 있다. 이게 자연인 생수보다 못하란 법 없다. 또 자연인이 산에서 장뇌삼이나 도라지 몇 뿌리 캔다고 부러워할 것도 아니다. 전철 타고 경동시장이나 모란시장 가보라. 거기 장뇌삼과 도라지, 황기, 당귀, 계피 등 약초 있다. 운동 삼아 걸어 다녀보면, 점봉산 곰취나물과 홍천 눈개승마 있고, 제천 도라지청, 인진 쑥청, 아로니아청 있다. 산속 걸어다니며 약초 캐는 일보다 훨씬 쉽다. 또 TV 광고 보면, 속초 오징어, 부산 곰장어, 여수 먹갈치, 영광 굴비, 태안 꽃게도 구할 수 있다. 산나물의 제왕 순창 참두릅, 울릉도 명이나물, 제주도 감귤, 고창 수박, 성주 참외, 영암 황토 고구마, 지리산 곶감, 의성 흑마늘을 전화 통화로 살 수 있다. 산이던 도시던 꼭 같다. 원칙 하나 지키면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소식 절제의 원칙이다. 채소 한 접시도 나는 자연인처럼 그 약효를 공부해가며 먹는다. 곰취, 눈개승마, 가죽나물, 두룹은 장아치 담아 즐긴다. 이런 사상 건강에 도움된다.     

 

 세 번째 장점은, 사실 이게 가장 중요한 것인데, 자연인은 산속에 혼자 살기에 모든 걸 자기 손으로 해결한다. 그래 나도 모든 걸 내 손으로 해결하는 원칙을 세우고, 자연인 흉내를 내보았다. 재료를 구하기 위해 마트나 재래시장 찾아가서 손수 먹거리 사 오고, 냉잇국도 끓여보고 부추전도 지져보았는데, 그래 봤자 그건 겨울에 눈이 한 자나 쌓인 밭에 나가서 배추 뽑는 일처럼 힘든 일도 아니고, 목욕물 장만하려고 얼어붙은 계곡에 가서 얼음물 떠오는 일도 아니다. 매운 연기에 눈물 흘리며 아궁이 불 붙이는 일도 아니고, 힘들게 장작 쪼개는 일도 아니다. 내가 암자에 혼자 사는 스님처럼 설거지와 청소 도맡아 하자, 아내가 처음엔 반신반의 바라만 보더니, 나중엔 봄바람이 되었다. 슬그머니 커피 끓여내놓고, '국엔 멸치 넣고, 파전엔 감자와 소량의 돼지고기 썰어 넣으면 사근사근 씹히는 맛이 좋다'고 코멘트 하면서 도와준다. 또 내가 30년 된 바바리코트 버리지않자, 아내가 새옷 사야한다고 야단법석이다. 그래 내가 '신라의 백결(百結)선생은 옷을 백 번 기워입어 백결인데, 자연인 될려는 나에게 새옷은 오히려 거북하다'고 젊잖게 말해주었다. 이리 되니 우리집은 저절로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다. 아내는 아침 산책길 에 따라 나와 벤치에 나란히 앉아 냇물에 헤엄치는 오리를 보면 그렇게 좋아하고, 보온병 들고와 차도 따라주고, 복숭아도 깎아 손에 쥐어준다. 언제 봄이 왔는지 모르겠다. 어느 날부터 아내 반응 3월 봄바람처럼 부드러워진 것이다. 이 모두가 내가 산에 사는 자연인처럼 사고방식을 바꾼 덕택이다. 그 바람에 이제 나는 살만하다. 집사람은 이제 내가 50년 전 교정에서 맘 설레며 바라보던 그 여학생이 되었다. 나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다. 그래 이게 전원의 꿈, 가화만사성, 두 마리 토끼 잡는 법이라 싶어 여기 공개한다.(시민방송 용인 202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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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기난 2021.01.10 20:35
    충남 태안에 전원주택 짓고 수영장까지 구비하고 마나님 한테 이사가자하니 "니혼자 가시오" 하더라는 서울 모회사 사장님 일화가
    떠오릅니다(저희 집 지은 시공사 관계자 말)
    발상의 전환으로 그런 불상사도 면하시고 즐겁게 사시는 모습
    보기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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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21.01.12 08:14
    去彼取此! ^^*
    미소가 부드러우셨던 사모님 소식도 이리 접하니 참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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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해봉 2021.01.12 21:19
    오래간만에 김현거사님의 좋은글을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좋은글을 부탁 드립니다
    슬기난님 허허바다님 아주 반갑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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