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라서 다행이다(둘레길 종주기)_제3장 제9절_마지막2

by 나그네 posted Mar 31, 2017 Views 2191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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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단하는 것도 편하지 않은데 하물며 장(障)의 중간에서 마치는 것은 더 모양이 이상하네요.
  총 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3장은 9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관심이 있으신 분은 https://www.facebook.com/baggsu/ 으로 오시면 나머지 부분도 모실 수 있습니다. 

 


제3장 마음보다 먼저 길들여지는 몸

제9절 점심도 굶고 몸도 지친 오후, 긴급 SOS!

 

계속되는 내리막. 이제는 바로 마을에 접어들겠지? 웬걸 거친 포장 임

도를 돌아 다시 오르막이 펼쳐진다. 그러면 그렇지 언제 이 길이 나를

해방시킨 적이 있더냐? 미동 마을로 접어드는데 어디선가 여름밤 모깃

소리가 제트기라면 흡사 대형 쌍발 수송기 같은 훨씬 중후한 소리가 귀

를 깨우고 아주 강한 향이 코를 두들긴다. 뭔가 해서 한참 주변을 돌아

보니 바로 오른쪽에 있는 매화나무에서 나는 소리와 향이다. 꿀을 따는

벌들의 합창과 그 벌들을 유혹하는 매화향! 2008년 4월 세 번째 백수 생

활을 마감하고 경남 진해에 직장을 구했다. 그래서 이듬해인 2009년 봄

을 맞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봄을 깨우는 꽃은 개나리 아니면 목련인 줄

만 알았다. 그런데 서울을 벗어나 시골을 다녀보니 봄을 깨우는 꽃은 개

나리도 목련도 아닌 매화였다. 그래도 지금껏 매화향을 맡아 본 적은 없

다. 이 날 난생 처음 이 황홀한 매화향을 처음 경험하고는 남원에 들어

설 때까지 수 일간 매화향에 젖어 살았다. 인간이 행복할 수 있는 요소

는 참 많다. 향기가 나를 즐겁게 하리라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다. 아,

이런 향기의 존재도 몰랐던 나는 얼마나 불쌍한 존재였던가! 이런 향수

가 있을까? 영화 ‘여인의 향기’의 주인공이었던 장님 프랭크 슬레드 중

령에게 소개하고 싶다.

 

미점 마을 언덕에 서니 탁 트인 시야가 그만이다. 특히 악양벌 한 가운

데 정답게 서 있는 그 유명한 부부송(夫婦松)이 안길 듯 가깝다. 다음은

오늘 무료 민박 주인 아들인 순필이가 소개한 문암송(文岩松). 천연기념

물이다. 여행길에서 만난 유일한 천연기념물이다. 바위 위에 떨어진 씨

가 발아해서 자란 것이라 하는데 눈으로 보기에는 소나무가 바위를 품

고 있는 듯하다. 이 나무 아래서 시인묵객들이 저 넓은 악양벌과 형제봉

의 풍광을 읊으며 풍류를 즐겼다 해서 붙인 이름이라는 데 역시 이름값

을 한다. 생명의 끈질김이 이 세상을 유지하는 가장 근원적인 힘이니 그

위대함과 강인함을 어찌 인간이 다 알 수 있을까?

 

만만치 않은 내리막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서는데 규모 있는 한옥들도

몇 채 있고 해서 우리는 쉽게 식당, 아니 국수 파는 집을 찾으리라 예상

했다. 시계는 벌써 3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초코바로 시장기만 때운 우

리에게 공복감은 일시에 밀려왔다. 길을 가고 있는 아가씨에게 물었다.

“혹시 동네에 국숫집 없습니까?”

“이 동네에는 식당이 없는데요. 저쪽 평사리까지는 가셔야…”

뜨아! 악양벌을 가로질러 평사리까지 가려면 족히 30분은 더 걸어야 한다.

“혹시 가게는…”

“저기 큰 나무가 보이는 마을 회관 앞에 있습니다만…”

말꼬리를 흐리는 게 어찌 좀 수상했다.

가게를 찾아 들어서니 연세 지긋하신 두 어르신께서 푸성귀에 막걸리를

들고 계시고 그 분들보다 족히 10년은 더 되어 보이는 할머니께서 방에

엉덩이만 걸치신 채 앉아 계신다.

“빵 좀 주십시오.”

“없어.”

“혹시 우유나 두유는?”

“없어.”

“시장해서 그러는 데 혹시 곡기가 될만한 건?

“막걸리나 드슈.”

 

순필에게 전화했다. 하동읍에서 저녁 장을 보고 있단다.

“저녁은 점심 먼저 먹고 그 뒤에 먹자. 이대로 가면 저녁은 병풍 뒤에서

냄새만 맡지 싶다. 총알처럼 날아와라”

 

친구는 총알처럼 날아왔다. 부인을 동반하고. 포섭에 성공한 모양이다.

멀리서 찾아온 지아비의 친구 주안상을 마련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잘라

내다 파는 지어미는 이미 박물관에서도 찾기 어렵지만 그래도 이게 어

딘가? 2004년 2월 지아비와 나 그리고 다른 동기 한 명이 중산리 - 법

천골 - 장터목- 천왕봉을 거치는 코스를 걸었다. 그 때 대단한 행운으

로 3대가 적공해야 가능하다는 천왕봉 일출의 장관을 구경하는 영광을

누렸고 하산길은 부담을 덜기 위해 대원사쪽으로 코스를 잡았는데 그

때 저 부인은 대원사까지 차를 몰고 마중을 와 주었던 그 천사표다. 첫

백수시절이었는데 나는 그 산행 수일 후 미국행 비행기를 탔었다. 12년

이 지난 이야기다. 악양벌을 가로질러 주택가를 통과해 입장료를 내지

않는 옆길로 쏜살같이 최참판 댁으로 갔다. 보통 평사리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장료를 내고 한참을 걸어서 올라가야 하는데 역시 지역

주민이다. 온갖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돈도 아끼고, 배와 등이 맞붙은

아사(餓死) 직전의 친구들을 걷지 않게 해 주니 더 이상 고마울 수 없다.

 

최참판 댁 담장 안에 있는 식당에서 국수 셋, 파전 하나, 막걸리 한 통을

주문했다. 선불이란다. 아뿔싸! 정말 맛없다. 아침 8시에 밥 숟가락을

놓고 근 6시간 15km를 걷는 동안 초코바 두 개와 물 그리고 가게 할머

니께 인사치레로 산 콜라만 먹은 우리들 입에 맛이 없으면 장담컨대, 정

말, 진실로, 맹세코 맛이 없는 거다.

 

먹는 둥 마는 둥 정말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만큼의 영양분만 보충

하고 우리는 최참판 댁을 돌고 친구 내외는 중단했던 장보기를 마무리

하기 위해 다시 하동읍내로 향했다.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그리고 이미

두 번이나 다녀온 곳을 건성으로 구경하다 약속 시간에 맞추어 보통 사

람들은 입장료를 내고 오르는 길을 내려갔다. 그런데 길 양쪽으로 거의

남대문 시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식당에서는 다양한 메뉴를 준비

해 놓고 있었고 냄새만으로도 그 맛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입을 모아 식사 전 친구에게 보냈던 찬사를 회수하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놈!”

세상 인심은 그런 거다. 입장료 낸 셈 치자!

친구의 부모님께서 사셨던(지금은 하동읍내에서 주로 기거하신다) 집

은 악양벌 동쪽 끝자락에 있는 매계리. 유씨(劉氏) 집성촌(集姓村)이다.

마당에 차를 세우고 옆집, 앞집에 담 넘어 큰 소리로 인사하기 바쁘다.

고마운 친구 부인이 근육을 많이 쓴 사람들한테는 단백질이 절대 필요

하다며 고기를 그것도 한우로 준비하셨다. 모두 대여섯 팩 정도 되는 데

슬쩍 곁눈질로 가격표를 보니 모두 3만원에 가까운 가격이다. 등심, 안

심, 갈비살, 제비추리.

‘그래 친구야 고맙다. 아니 아주머니 고맙습니다. 그대들 덕에 우리가

산다. 아니 걷는다.’

고기 굽는 냄새로 온 동네 길 고양이들 다 모일쯤, 한 분 두 분 친척 어르

신들이 찾아오신다. 냉동실에 보관했던 곶감 상자를 들고 오신 숙모님

그리고 칡꽃 술과 고로쇠물을 가져오신 작은아버지 감사합니다. 한우

로만 배를 채웠다.

‘친구야 아까 회수했던 찬사 다시 가져가라. 미안하다. 방정을 떨어서.’

세상 인심이 원래 그런 거다.

여고에서 지구과학을 가르치는 친구의 지도 편달 아래 고개가 아프도록

하늘을 바라보면서 오리온좌 삼태성(三太星)으로 시작해서 카시오페이

아자리, 큰곰자리, 작은곰자리, 북두칠성 등등. 오랜만에 공부 좀 했다.

진주로 떠나면서 친구 부인이 남긴 한 마디

“내일은 좀 힘드시겠네요!”

까짓것 죽기야 할까? 지리산 둘레길이 나를 실망시킨 적은 아직 없었다.

하동 악양의 밤은 또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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