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라서 다행이다(둘레길 종주기)_제3장 제2절

by 나그네 posted Jan 15, 2017 Views 1848 Replies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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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11>
제3장 마음보다 먼저 길들여지는 몸
제2절 먼 길 찾아온 스님의 제언, 하루 정도 입을 닫아보라
 

위태 마을에 도착했다. 굳이 벽송사를 들를 필요가 없다고 충고하셨던
양재삼 선배의 고향 마을이다. 대부분의 경우 재를 넘어서면 탁 트인 평
지에 양지바른 언덕 쪽으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평지는 경작하고 언
덕에 모여 산다. 거의 예외가 없다. 또 시선을 확 사로잡는 범상치 않은
집들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소위 귀농한 사람들의 전원주택이다. 그런
데 대부분 토박이들이 운영하는 민박에서 들은 그들에 대한 평가는 그
리 우호적이지는 않았다. 한결같은 지적은 지역 주민들과의 조화(調和)
문제이다. 그런데 우리가 들렀던 어느 민박집은 드물게 외지인이 이주
해서 운영하는 곳이었는데 그는 처음 그 마을로 이주했을 때 텃세가 심
해 마음고생이 아주 심했다고 하니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지 싶다.
 

“이제 마을에 들어왔습니다. 정확한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요?”
“맞은편 언덕이 보입니까? 크게 쓰여 있는데요.”
고개를 들어 휘 한 바퀴 돌리니 저 멀리 보인다. 민박! 멀다. 족히
3~400 m는 되지 싶은데 이 정도 거리에서 확실하게 읽을 수 있으면 도
대체 저 글자는 얼마나 큰가? 현장에 가서 확인해 보니 대형 컨테이너
한 개에 한 글자씩 쓰여 있었다. 그런데 저 곳까지 걸어가면 내일은?

 

“둘레길에서 벗어납니까?”
“아니오. 바로 집 앞이 길입니다.” 아싸! 이제 빨간 화살표를 따라 걷는
일은 대한민국 동급 최강이지만 그래도 아직 더 걷는 부담은 싫다. 어제
머물렀던 집도 구간 종점에서 1km는 더 걸어갔다. 그 집도 노선에서 겨
우 30여 m 정도 벗어나 있어 다행이었지만 어쨌든 마쳤다고 생각한 이
후에 더 걷는 것은 참 부담스럽다. 원초적인 심리이지 싶다. 이 민박은
성심원이나 탑동 민박처럼 바로 노선상에 있으니 그런 점에서 입지 조
건은 최고다. 가탄을 출발해 송정 종점에서 경로를 벗어나 근 1km 이상
가파른 아스팔트 길을 따라 걸어야 했던 그 민박은 최악이었다. 마을을
가로질러 다시 고갯마루를 반쯤 올라 도착하니 범상치 않은 덩치와 인
상의 흰 진돗개가 우리를 맞는다. 모습은 거의 동네 조폭 수준이다. 얼
굴 이곳저곳 흉터가 많다. 개를 싫어하지 않는데 이런 인상은 처음이다.
이후 이 녀석과 어떤 인연으로 묶일지 그때는 전혀 알 수 없었으나 여하
튼 인상에 비해 태도는 아주 공손하다. 처음 만나서부터 다음 날 헤어질
때까지 만 24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짖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추적추적 비는 그치지 않고, 젖은 신발이 문제다. 특히 L의 신발은 거의
방수가 되지 않는 신발이라 화목(火木)보일러 옆자리에 곱게 모셔 말리
기로 했다. 방은 두 개. 고르라는데 큰 방은 메주냄새가 아주 심하다. 결
국 넓이보다는 향기를 선택하고 재빨리 세탁기를 돌린다. 젖은 옷은 부
담이 크다. 아직 기온이 그리 높지 않지만 밀폐된 배낭에 젖은 옷가지를
넣고 다니면 쉽게 부패(?)하기 때문이다. 가건물 샤워장에서 따뜻한 물
로 씻고 나니 몸은 금세 데워지고 아주 뽀송뽀송한 것이 상쾌하다. 그런
데 한 가지 어색한 상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좌변기가 아니다.
소위 쪼그려 쏴! 다리에 웬만큼 근육은 붙었으나 여전히 쪼그려 앉아 일
을 보는 것은 힘들다. 마지막 날 실상사 해우소에서 잔여물을 해결하기
위해 추가로 잠깐 들렀던 것을 제외하고는 유일했다. 누군가 그랬다. 지
금 이 나라는 짚이나 호박잎을 사용했던 세대부터 비데를 사용하는 세
대까지 공존한다고. 인류 역사상 이런 속도로 변화한 민족은 없었다고.
그래서 세대차가 크고 또 어쩌면 한순간 호박잎으로 돌아갈 위험도 내
포하고 있다고. 상당 부분 동의한다.

 

그날 저녁 두 번째 위문단이 방문했다. 강원도 산사를 지키는 스님! 고
교 5년 후배 지휴 법타(之休 法陀) 스님이다. 10여 년 전 우연한 기회에
만나 꾸준히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데 지금의 이 백수 생활이 결정되었
던 1월 말 스님이 책임을 맡고 있는 강릉의 사찰에서 이틀 밤을 머물며
인근의 눈 덮인 칠성산도 오르고 귀로에는 태백산도 들렀다. 나로서는
어쩌면 지금 이 여행의 연습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내 처지가 계속
신경이 쓰였는지 자주 근황을 묻길래 이번 여행을 알렸고 일정이 맞으
면 하루라도 같이 걷고 싶다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아 남해를 거쳐 김해
로 가는 길에 잠깐 들러 공양이라도 같이 하겠단다. 미리 운은 떼 두었
지만 두 친구는 상당히 의아해한다. 아무리 고등학교 후배라지만 스님
이 그것도 강원도 강릉에서 경남 하동까지 와서 밥을 사겠다고! 중생제
도(衆生濟度)가 출가자의 첫 번째 임무이긴 하지만 이 먼 길을 달려오게
하는 건 분명 민폐다.

 

저녁 식사자리에서 스님의 제안.
“하루 정도는 입을 닫아보십시오. 아마 3천배보다 조금 더 힘들지도 모
릅니다.”
지난 1월 산사를 찾았을 때 동행이 있었는데 고교 1년 후배 김현겸이다.
스님과도 구면이고 고교 시절 불교 학생회를 다닌 경력이 있는 독실한
불교 신자인데 산도 거의 다람쥐처럼 타는 친구다. 그때 산사 방문 목적
중 하나가 3천배였다. 둘째 날 아침 호기롭게 법당으로 가 좌복을 펼치
고 시작했는데 나는 108배 2번에 포기하고 말았다. 분위기를 깨지 않으
려고 잠깐 좌선에 들었으나 영 마음마저 산란해 법당을 떠났는데 이 친
구는 거뜬히 1000배를 하고 나타났었다. 이번 여행 준비 과정도 이 후
배의 도움이 컸지만 끝내 합류하지 못해 아주 유감스럽다. 세 명 모두
흔쾌히 그 제안을 수용, 마칠 때까지 번갈아 가며 하루쯤 입을 닫았다.
어차피 이 길은 자기를 돌아보러 나선 길이었으니. 나를 돌아보는 일에
도 도반(道伴)이나 선현(先賢)들의 충고는 큰 보탬이 된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D대학 불교학과를 졸업한 정통파 스님에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스님들은 근무처가 대부분 산에 있으니 승과(僧科) 교양
필수 과목으로 등산이 있지 않느냐고. 그래서 실은 동행한다면 발걸음
을 따라잡기 힘들겠다고 속으로는 걱정도 했었다. 그랬더니 큰 사찰에
서는 산불을 끄러 뛰어다닐 수 있는 체력을 기르기 위해 축구나 족구를
자주 한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달마야 놀자’라는 영화에서 본 조폭과
스님들의 축구 시합 장면이 떠올랐다. 웬만한 팀에게 지지는 않는단다.
영화에서도 스님팀이 이겼지 싶다.

https://www.facebook.com/baggsu/posts/1903785106516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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