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라서 다행이다(둘레길 종주기) _ 백수5계명

by 나그네 posted Dec 31, 2016 Views 1856 Replies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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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9>
네 번의 실직으로 체득한
백수 5계명,
움직여라 !

 

어느 날 아침부터 갑자기 집을 나서 갈 곳이 없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히 한 번도 그런 경험이 없거나 나이가 적을수록 더욱 그렇다. 절대 경계할 일은 이 상황을 어떤 심각한 문제로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닌 듯 당연하게 받아들이라는 뜻도 아니다. 상황을 문제로만 인식하면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되거나 누군가를 원망하게 되는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또 이 상황이 장기적으로 반드시 나쁜 결과를 초래하리라는 것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직장을 보유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또 그런 삶을 지향할 일도 아니지 않을까? 천수(千壽)를 누리고 떠나든 대단한 심리적, 재정적 준비를 하고 떠나든 상당기간 심리적 공항상태는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래서 이 책의 추천사도 써 준 미래에셋은퇴연구소장에게 우스갯소리로 부설 백수문제연구소를 만들라 권유한 적이 있다. 누구나 심리적, 사회적으로 ‘백수’라는 과정을 거치므로 제대로 이 과정을 이겨내지 못하면 은퇴자로 연착륙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래 글은 2003년 10월부터 시작해 도합 4번, 총 2년 7개월 동안 직장 없이 지낸 경험의 산물이다.

 

1. 3개월 프로젝트를 만들어라
처음에는 좀 강하게, 바쁘게 시작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갑작스레 닥친 이 일의 의미가 지나치게 과장되게 느껴지지 않도록 스스로 위장막을 칠 필요가 있다. 한 3개월 그렇게 지내다 보면 안정을 찾는다.

 

나는 이번에 지리산 둘레길을 걸었다. 총 14일 걸렸고 준비하는 시간, 다녀와서 회복하는 시간, 찍은 사진을 정리하고 지금 이 원고를 완성하는 데까지 적지 않은 시간이 투입되었다. 처음 직장을 잃었을 때 세 가족이 비행기를 타고 떠나서 돌아오는 데까지 23일이 걸렸다. 또 내 기억이 닿아 있는 시절부터 당시까지 살았던 곳들을 모두 둘러보는 데 10여 일을 보내기도 했다. 막 장마가 끝난 8월 초 비슷한 처지의 친구와 난생 처음 2박 3일간 지리산을 종주했고 이듬 해 1월 하순 칼바람이 몰아치는 영하 15도의 날씨에 기를 쓰고 지리산 천왕봉을 올라 그 장엄한 일출도 보았다.

 

세 번째 쉴 때는 우리나라의 국립공원 산 중 올라보지 못한 산들은 모두 찾아가는 데 두어 달이 걸렸다. 1년 동안 약 100권의 책을 읽었다. 사실 그 때 읽었던 도보 여행에 관련된 책들이 이번에 나를 이 길로 떠밀었다.

 

직장인들은 돈은 있으되 시간이 없다. 상사 눈치를 보다 한 푼 보상도 받지 못하고 날려버린 휴가가 그 며칠이던가? 백수는 시간은 있으되 당분간 수입이 끊긴 상태다. 마음은 굴뚝이지만 시간이 없어 하지 못했던 일들을 찾아라. 혹시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날려보낸 휴가를 너무 안타까워 마라. 어차피 당신은 기껏 집에서 낮잠이나 잤을 거다.

 

지리산 둘레길이든, 제주 올레길이든 아니면 스페인 산티아고 길이든 그도 아니면 백두대간 종주라도 해 보라. 지난 10년간 베스트셀러 중 읽지 못한 책들도 좋다. 소싯적에 읽었던 삼국지를 다시 들어도 좋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닥터 지바고‘, ‘벤허’ 등등 고전 명화도 좋다. 요즘은 동네방네 도서관들이 즐비하고. DVD도 빌려준다.

 

1981년부터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꼭대기까지 가는데 15년이 넘게 걸렸다. 서대문형무소, 종묘, 후원(비원)까지는 30년이 넘게 걸렸다.

 

네 번의 백수경험을 끝내고도 늘 남는 회한은 좀 더 충실하게 잘 놀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늘 새로운 자리가 정해지고 출근하기 전까지 입대 일자를 받아 둔 청년처럼 조급했다.다람쥐 생활을 시작해서 조금만 익숙해지면 늘 자유로웠던 그 백수 시절이 그리워진다. 이 압박이 싫어서가 아니라 해 보지 못한 일들이 무시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상황이 예상된다면 미리, 예상하지 못했다면 만사 젖혀두고 이 계획부터 세우라. 그래서 최소한 3개월 정도는 반드시 그동안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하지 못했던 일을 해 꼭 시도해 보시라. 당장 하루 이틀 사이 해결될 일은 아니다. 조급해 하지 마라.

 

2 해가 뜨면 나가서 해가 지면 들어와라
아직 한국 남자는 해가 뜨면 집을 나서서 해가 진 후 들어와야 한다. 최소한 이
대목은 지켜야 대접을 받고 체면을 유지할 수 있다. 약간의 사생활 보호 효과도 있다. 극단적으로 정년 퇴직한 어느 교수는 2층 단독 주택에 살았는데 퇴직 후 아침 식사를 마치면 정장 차림에 2층으로 올라가 책을 읽고 글을 썼다고 한다. 부인은 점심을 올려 주고.

 

대한민국 중년 남성에게 집이라는 곳은 그리 편안하고 익숙한 공간이 아니다.
특히 평일 낮 시간은 아주 어색하다. 그들에게 그곳은 쉬는 곳이지 일하는 곳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여성의 공간이다. 해가 뜨면 집을 나서라. 갈 곳을 만들어라.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으로 가라는 뜻이 아니다. 책상과 컴퓨터 그리고 인터넷만 있으면 된다. 요즘은 노트북에 스마트폰을 연결해서 쓰면 된다. 변호사, 세무사, 회계사 등 사무실을 가진 친구의 한 공간을 빌려 그곳 분위기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고 지낼 수 있으면 최선이다. 몇몇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적극 추천한다. 여하튼 공간을 만들어 아침에 집을 나서서 갈 곳을 만들어라. 약속이 없을 때 앉아서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거나 웹서핑이라도 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네 번 동안 한 번도 이 원칙을 어긴 적이 없다. 사회에서 만난 후배부터 사촌 형이 운영하던 회사 그리고 조직에 있을 때의 협력사까지. 참 고마운 일이다. 내가 회사를 운영할 때 비슷한 처지에 있는 어느 분에게 공간을 내 준 적도 있다. 책을 읽든, 낮잠을 자든, 웹 서핑을 하든 나가서 해라. 학교에서 돌아 온 아이들은 부담스러워 하고, 집사람은 외출하기도 어렵고 전화통을 들고 수다를 떨기도 불편하다. 불필요한 만 가지 갈등의 근원이다.

 

3.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어라
다람쥐 쳇바퀴 같았던 시간들이었지만 사라지면 어색하다. 숙취로 쪼개지는 머리를 감싸고 지하철에 몸을 실어야 했던 그 반복이 우리의 의지와 자율적 판단력을 너무나 많이 앗아갔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혹시 들어는 보았나? 건강상의 이유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 가장 행복하다고! 돈이나 지위가 아니라 일정한 생활 리듬을 제공하면서 약간의 수입도 보장해 건강을 유지하게 해주는 직장!

 

이른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나는 생활도 하루 이틀이다. 실신할 정도가 아니면 몸을 써야 술도 빨리 깬다. 생활의 리듬을 지켜라. 이제는 아무도 강요하지 않는다.

 

오대산 월정사 템플 스테이에 참가했을 때의 일이다. 본격 발우 공양까지는 아니었지만 스님은 사찰에서의 법도에 대한 강의 시간에 공양 중에는 소리를 내지 말고 음식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 이후 첫 공양 시간. 겨우 10여 분만에 식사를 마치는 참가자들을 보고는 다음 공양 시간부터 30분을 채우라셨다. 식사를 마쳐도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다음 공양시간에도 모두 30분은 커녕 습관대로 10여 분만에 식사를 마치고 난생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아 남은 20분 동안 결국 눈싸움을 해야만 했다. 하다못해 밥알이라도 씹으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편이 훨씬 편안하다는 건 쉽게 알만한 일인데… 결국그 습관은 2박 3일 마지막 공양 때까지 고치지 못했다. 지금 우리는 식사속도를조절하는 능력마저도 상실했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20년, 30년 별 생각 없이 편승했던 그 생활의 틀이 사라진 후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이 주어진들 훈련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선택권이 불편하지도 모른다. 이런 모습을 어린 시절부터 발목을 잡고 있었던 그 볼품없는 쇠줄을 극복하지 못하는 다 커버린 코끼리나 남북전쟁 직후 주인 곁을 떠나지 못했던 흑인 노예에 비유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건설적이면서도 안정적인 생활리듬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는다. 이제 점심시간 마다 뭘 먹겠느냐고 묻던 최 대리도 김 과장도 곁에 없다.

 

4. 무언가를 보충하라
주변 신참 백수들에게 간혹 내뱉는 말이다.‘몸, 마음, 머리 중 하나라도 연마하고 있다면 당신은 백수가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매일 아침 산책이라도 가라. 헬스장 아니면 동네 수영장이라도 가라. 잘 모르시겠지만 이제 대한민국도 살만해져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공설 헬스장, 수영장등의 사용료는 생각보다 싸다. 강좌들도 많이 있다.

 

템플 스테이라도 가보라. 고요한 산사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좌선이라도 해보라. 처음에는 분노와 원망으로 하나, 둘, 셋을 세기조차 어려울 거다. 그런 마음상태로는 새로운 시도가 불가능하다. ‘감히 세상이 나를 몰라준다.’는 호기와 서울역 노숙자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조울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일지도 모른다. 경험이 없어 잘 모르지만 교회 기도회 같은 것도 결코 나쁘지 않을 거다.

 

어깨너머로 배운 실력으로 겨우 워드 프로세서로 자구(字句) 수정이나 스프레드시트(엑셀)의 사칙연산 정도만을 해 봤다면 아주 초보적인 컴퓨터 입문서를 한 권 사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겨가며 따라 해 보라. 자동차 메이커 임원 출신인 어느 선배는 은퇴 후 작은 사무실을 하나 얻고는 가구부터 컴퓨터까지 직접 돌아다니면서 사는 것부터 시작했단다. 이미 그런 일을 직접 하지 않은지 10년이 넘은 분 나름의 적응 방법이다.

 

파인만도 읽어 보고, 장자도 읽어 봐라. 윤동주 시집도 좋고 손철주의 ‘인생이 그림같다’도 강력 추천한다. 박종훈이가 쓴 ‘내가 사랑하는 클래식’도 한 번 읽어 봐라. 김종운이 쓴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도 이 땅의 중년이 꼭 읽어 볼 책이다. 영화관도 전시회도 음악회도 가 보라. 단, 가급적 그런 곳은 아내나 친구랑 가라. 혼자는 외롭다.

 

마음도 몸도 머리도 닦지 않으면 당신은 완전하고 영원한 백수다.

 

5. 숨지 마라
마치 세상 사람들이 나만 바라보는 듯하다. 현금영수증이 필요하냐고 물을 때 아니라 답하면서 혹시 저 사람이 내가 소득공제 받을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걸 눈치챈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경우도 있다. 평일 낮 시간을 돌아다니면 남들이 나만 보는 듯하다. 절대 그렇지 않다. 지금 버스 안에서, 전철에서, 길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또래의 남자들이 보이시는가? 그들 모두 직장 없이, 할 일없이 돌아다니는 걸로 보이는가? 당신은 예전에 그런 사람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나? 당신의 이마에는 주홍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다. 극단적으로 그들은 당신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당신은 세상의 짐이 아니다. 누구 못지않게 이 사회와 가정에 공헌한 사람이다. 지금 잠시 직장이 없을 따름이다. 정기 예금 통장의 이자(비록 최근 수 년간 아주 의미 없는 수준으로 떨어졌지만)가 붙고 있고 펀드는 수익이 생겼으며 보유 중인 주식은 오늘 5퍼센트가 올랐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대학 동기회도 나가고, 대학 서클 OB 모임에도 나가 사람을 만나라. 새로운 사람도 만나라. 그리고 당당히 “당분간 명함 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이야기해라. 그러면서 기회를 봐야 한다. 내가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일을 할 수 있으며 또 무슨 일을 찾고 있는지 방송하라. 우리 속담에 ‘병은 자랑하라’라고 했다. 좋은 일은 혼자서 즐겨도 되지만 나쁜 일을 혼자 안고 있으면 곪아 터진다.

 

과거에 당신에게 신세진 사람, 시간이 없어 만나지 못했던 친구, 후배, 선배들을찾아가 점심도 얻어먹고, 소주도 얻어먹어라. 동굴 속에 있는 당신을 찾아와 구제해 줄 만큼 한가한 현대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요즘은 수입품 쑥과 마늘이 많아 동굴 속에서 백일 동안 줄창 먹어도 우리 배달민족의 시조처럼 사람이 될 확률이 예전처럼 그리 높지 않다. 대학교수인 어느 선배가 나에게 붙여 준 별명은 ‘한국에서 가장 뻔뻔한 백수’였다. 의기소침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이 좋아 보인 적은 없다. 눈물에 젖은 눈으로는 미래를 볼 수가 없다. 무지개는 항상 하늘에 떠 있다.

 

저잣거리에 기회가 있다.

 

인간은 개구리도 뱀도 아니다. 가슴이 식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몸을 움직이거나, 감동적인 상황을 만들어 정서적 충격을 주거나 하다못해 알콜이라도 부어 36.5도를 유지해야 한다. 그늘진 곳에서 혼자 머리만 쥐어뜯고 앉아서 36.5도를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언제 어떤 순간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무언가를 하는 것이 낫다.


특별한 상황이면 특별한 대처가 필요하다. 그냥 감기 몸살이면 며칠 쉬면 된다. 단순한 염증이면 항생제 몇 알로, 간단한 소화 불량이면 3끼만 굶으면 상황 종료다. 다만 이것이 입원을 요하는 중증이라면 상황은 다르다. 특별한 치료법이 필요하다.

어떤 처방과 치료법이 효과가 있을지는 사람마다 다르다. 허나 특별한 처방이나 노력 없이 시간이 흘러가면 저절로 해결될 수준의 일은 분명 아니다. 어쩌면 바닥을 쳐야 할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 반드시 바닥을 쳐야 할 거다. 그래야 박차고 오르기가 편하다. 힘도 덜 든다. 그러니 가라앉는 동안 너무 힘을 빼지 마라. 박차고 오를 힘마저 소진해 버리면 곤란하다. 그리고 간혹 바닥에 도착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간 이 생활에 너무 익숙해져서 박차고 오르기를 포기하거나 최악의 경우 호미로 바닥을 파는 일은 가장 경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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