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마귀

by 두레네집 posted Feb 10,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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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눈이 소복히 내린 다음날.
무척이나 파란 하늘위로
눈으로 다 볼 수 없는 부신 세상이
실눈 사이로 접혔다 펴지고,
햇빛은 이제 막 녹아내리는 눈발 위에 머물다
눈길 머금은 고드름 끝에 엉겨있습니다.


똑똑 떨어지는 푸른 잣나무 새로 시커먼 날것들의 엄습.
저승사자의 친구로 소문난 게걸스런 무리.
흰 세상을 가로지르는 아르르한 소리로 기세를 올리고
교정을 지키는 눈 덮인 사자상마저 덮어 누룹니다.
천지를 덮어버린 흰 눈을 어찌할 수 없어
사냥거리라도 내어달라는 시위로 보이고...


녹아나는 양지녘 아래
내어버린 쓰레기의 잔해가 흉하게 드러나는 오후
진흙탕 위로 드세게 날개짓하는 까마귀의 잔치.





일제가 망해버린 해방후의 한국사회는
눈덮인 신세계였습니다.
우리민족에게 가슴 벅찬 희열을 안겨준 환희의 세상이었다 합니다.
모두들 감사히 하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그런 날이었을 것입니다.
배고파도 하나도 아쉬울게 없는 그런 날이었다고 외할아버지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을 시기하는 속물도 많았을 것입니다.
권력의 머슴은 갖고 있던 밥사발을 빼앗길쎄라 한데 뭉쳤고
오히려 자기들이 갖고있던 모든 수단을 동원해 협박과 테러를 자행하며
우리가 그렇게 원했던 희망의 세계를 가려놓았었지요.
시간은 흐르고 배반자를 척결하지 못한 마음씨 여린 민족의 동정에
오늘의 우리 사회는 더욱 난장판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일제의 앞잡이들을 조금만 더 확실하게 정리만 했더라도
쓰레기를 뒤집는 하이에나와 까마귀들을 제대로만 손보았더래도
오늘 그 후예들의 잔치판은 안벌어졌으텐데...


첫 단추를 잘 껴야 하는 법입니다. 처음부터 잘못 끼면 전부 풀러서 다시 껴야합니다. 그래야 가장 어울리는 모습이 되기 때문이지요. 역사가 많이 흘렀어도 우리 세대와 다른 세상이 왔다고 하더라도 진실만은, 역사적 사실만은 직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일제 앞잡이들의 후예가 아무리 돈과 권세를 휘두르더라도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기 위한 자료집 출간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처음부터 부도덕한 이들을 수용한 우리 한국 현대사회의 지도층 때문에 지난 50 여년간 늘 제자리 걸음만 하고... 결국 그 타성에 젖어 이기주의, 남의 탓, 기회주의, 배금사상의 만연으로 동방예의지국은 유래가 없는 이혼대국과 비도덕적 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엉킨 실타래는 살살 풀어내든지 아니면 알렉산더처럼 도끼로 짝어내든지,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풀어내야만 합니다. 지난번 장준하 선생의 인물 한국사라는 TV프로그램을 보면서 젊은이의 피는 뜨겁다는 지난 시절을 떠올려보았습니다. 우리 집 책꽃이에는 지난날 수집했던 사상계 잡지 과월호가 몇 권 있습니다. 4월 혁명 직후의 것과 다음해 군사쿠데타 직후의 발간본입니다. 두 사건에 대한 장준하 선생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책입니다.


곪고 곪다 혁명으로밖에 풀 수 없었던 성질 급한 한국인들의 역사기록입니다.
혁명이라는 말을 좋아하는 한국인들은 말끝마다 선거혁명, 경제혁명, 개혁이니 이노베이션(innovation)이니 떠들어대지만 여적지 그 열매는 맺지 못했습니다. 짧은 역사 속에서 몇 차례의 격변기에도 끝내 변화가 없었던 이유는 결국 잘못 끼운 첫 번째 단추를 그냥 두고 자꾸 밑의 단추만 끼우려 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일제의 잔재는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반드시 청산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보편적인 세계 역사의 순리입니다.
비록, 현실 세계에서 악이 이기는 것 같아도 말입니다.


P.S. - 눈 녹은 후의 질척거리는 흙 길을 밟다,
       까마귀를 보았는데...
       애꿎게도 멀쩡한 날짐승에게 된소리를 뱉을 줄이야.
       사람이 잘못 살아놓고는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