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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휴정 서산의 청허집을 통틀어 “두류산 신흥사 능파각기”를 지리산관련 글 중에서 으뜸이자 최고의 명문장으로 꼽는다.

능파각은 칠불사 삼거리에서 신흥사(지금의 신흥초교 자리) 앞으로 건너는 곳에 있던 교량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청허집에는 이 교량의 생김새를 골짜기 양편의 바위를 기둥삼아 한 층의 긴 다리를 놓고 다리 위에는 다섯 칸의 누각을 지어 붉은색으로 단청을 하고는 다리를 홍류교, 누각을 능파각이라 하였다.

능파란 아름다운 여인이 물결 위를 사뿐사뿐 걷는 모습이니 화개동천을 흘러내리는 물결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요, 능파각이란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고 불가로 귀의하는 문을 뜻하니 홍류교의 능파각을 지나서야 비로소 신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다.

휴정은 이 모습을 “아래로는 황룡이 물결에 누워 있는 듯하고, 위로는 붉은 봉황이 나는 듯하다”고 하였다.

황룡의 등을 타고, 봉황의 날개 위에 앉자 있으면 신선 아닌 사람이 또 어디 있으랴!

  

휴정은 능파각기에서 왜, 누가, 무슨 연유로 이 다리를 놓았으며, 화개동천에 사람들의 사는 모습, 골짜기 풍경, 승려, 시인, 도사(선인)들의 수행모습까지 그려놓아 직접 보는 것보다도 더 선명하게 머릿속 상상력을 극대화 시킨다.

그것은 마치 솜씨 좋은 화공이 선仙 세계를 그려놓은 여러 폭의 병풍을 보는 듯하고, 안견의 몽유도원도처럼 현세와 이상이 공존하여 꿈을 꾸는 자들만이 볼 수 있는 신세계가 떠오르기도 한다.



능파각를 쓴 시기가 그의 나이 44세,

31세에 승과에 급제하여 36세에 승장의 최고직위(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에 오르지만 명리가 출가의 본뜻이 아님을 알고 홀연 지팡이와 바릿대 하나 들고 길을 나선 후 금강산에서 반년을 머물고 다시 지리에 들어 내은적암, 황령암, 능인암, 칠불암 등에 머물던 시기에 쓴 기록이다.

다시 말하면 심공의 초심으로 돌아와 청허당을 짓고 그곳에서 머물며 사물을 보는 심안과 느낌으로 풀어내는 혜안이 최고조에 달하였음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신흥사를 들어가는 화개동천이 호리병을 드나드는 것 같다’,

‘섬진강너머 백운산에서 흰구름이 피어 오른다’,

‘화개동천을 흐르는 맑은 물이 돌에 부딪쳐 소리를 내며, 놀란 물결이 한 번 뒤치면 수천 송이 눈꽃을 만들어 흩날린다’라고 하였다.

가히 승려 이전에 대문장가의 필심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마을 정취 또한 꽃과 대나무가 어우러지고, 닭울음소리와 개가 짖고, 사람들은 순박하고 예스러우며, 늙은 중이 찾아오는 고즈녁한 산골 마을이다.



능파각에 오르면 스님은 선정禪定에 이르고, 시인은 싯구가 일어나고, 도인은 모습을 바꾸지 않고 곧바로 선인仙人이 될 수 있다고 하였으니, 마음 하나 비우지 못하는 우리가 가히 그런 경치를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이곳의 정취를 노래한 부분에서는 능파각기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명문장이 수를 놓는다.

  

「능파각은 몸이 백 척 위에서 별을 따는 듯한 정취가 있고, 눈은 천 리나 열려 하늘에 오르는 듯한 정취가 있다. 외로운 따오기가 스러지는 노을 속으로 날면 등왕각1)에 오른 듯한 정취가 있고, 하늘 멀리 세 봉우리를 보면 봉황루2)에 오른 듯한 정취가 있다. 맑은 시내와 꽃다운 풀은 황학루의 정취가 있고, 복사꽃이 떨어져 흐르는 물은 도화원3)의 정취가 있다. 비단을 펼친 듯한 가을의 단풍은 적벽4)의 정취를 느끼게 하고, 반가운 손님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은 호계5)의 정취를 가져다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계라 할 만한 세상 모든 정취를 고루 갖춘 고결한 곳임에도 오르는 사람 신분 구분이 없었다.

“짐을 진 사람, 인 사람, 농사짓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목욕하는 사람, 바람을 쐬는 사람, 시를 짓는 사람뿐만 아니라, 물고기를 바라보거나 달을 감상하는 사람도 누구도 이 곳에 올라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깨친 사람이건, 초월한 사람이건, 양반이건, 상놈이건, 하다못해 할 일 없이 빈둥거리는 한량들 까지도 그 다리는 만인의 쉼터이자 안식처였다.

사대부 사상이 사회전반에 깔려있던 조선조 봉건사회에서 자비에서 우러나오는 인간평등의 단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종장에 가서는 태초에 하늘이 이 신령한 곳을 숨겨놓은 것을, 지금 두 사람(옥륜과 조연스님)이 구름을 꾸짓고 산문을 열어 산과 절과 골짜기를 인간세상에 드러내어 이름을 숨기기 어렵게 한 일을 안타깝다고 노래하였다.

이는 “구름을 꾸짓어 산문을 열었다”는 표현처럼 승경의 훼손이나 많은 묵객들이 찾아와 어지럽히는 것을 안타까워함이 아니라 감추어 두고 싶었던 승경들을 노래함에 있어 그 아름다움의 정도를 한껏 증폭시키기 위한 반어의 심정으로 해석된다.

마치 퇴계 이황이 청량산 육육봉을 복사꽃이 강가로 흘러 어주자가 알까 두려워하는 심정처럼 말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능파각은 임란에 왜놈들 손에 불태워져서 30년 남짓 밖에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남녀노소 누구나 선계의 정취를 즐길 수 있었던 능파각, 눈을 감으면 선하게 떠오르는 황룡이 누운자리......



그러나 지금은 홍류교와 능파각이 자리했던 동천에는 볼품없는 시멘트 교량 하나가 초라하게 걸려 있고, 별천지와도 같았던 화개동천 기슭의 신흥사 자리에는 초등학교가 터를 잡고 있다.



그뿐인가? 학교 앞 도로변에는 개딱지만한 민박집이 덕지덕지 붙어있고, 학교 뒷 곁 대밭에 쓸쓸히 서있는 부도가 쓴 웃음을 짓고 있다.



그러나 우습게도 애써 돈을 들인 내은적암 터 오름길(엄밀히 말하면 차밭 오름길) 나무계단과 차밭 정자는 칡넝쿨이 뒤엉켜 찾는 이가 없고, 의신마을을 오르는 옛길을 서산대사의 이름을 빌려 사람의 발길을 찾고 있지만 오래 가지는 않을 것 같다.

선후 좌우 없이 써버린 공연한 세금발림은 환영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애써 찾은 이에게 까지도 심란한 마음을 안겨주게 된다.

  

고증된 역사는 복원되어야 한다. 왜놈들이 군국주의 망령에 불씨를 살리고 있는 이 마당에 역사의 편린을 꿰어 맞추는 일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일은 아닌 듯싶다.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선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것이 지금 우리의 할 일 아닌가 한다.




  - 구름모자 -




참고문헌 : 청허집 제5권 (박경훈 역)

                디지털하동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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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경 2013.08.30 11:16
    황룡이 누운듯 봉황이 나는듯~~
    화개동천의 아름다운 옛이야기 감사합니다
    선인들의 숨결을 마음의 눈과 귀를 열어 찾아야할 우리의할일
    모두가 힘을 모아 고증된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는
    구름모자님의 말씀~~ 다시한번 새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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