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시루봉의 '선교 유적지'...(2)

by 최화수 posted Dec 12,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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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506미터의 노고단에 40평의 단층 '노고단산장'(무인산장)이 세워진 것은 1971년이지요. 우종수의 구례 연하반산악회(지리산산악회) 등이 벌였던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운동이 1967년 결실을 맺었었지요. 노고단산장도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받은 데 따른 하나의 부수적 경사라할까요. 무인산장으로 폐가처럼 버려진 것을 고쳐 함태식 관리인이 입주한 것이 한 해 뒤인 1972년이었습니다.

노고단에는 나라에서 세운 이 노고단산장보다 무려 반세기를 앞질러 선교사들의 수양관이 들어섰답니다. 이른바 '외국인 별장' 또는 '외국인 별장촌'이라 불리는 것으로 1920~25년에 걸쳐 교회당 등 무려 49동의 건물이 세워졌답니다. 일제(日帝)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도로도 차량도 없었던 그 시절에 어떻게 그 높은 곳에 그 많은 건물을 세울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도 크고 키도 큰 서양인들이 노고단 고원에 별장을 지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시원하게 지내는 것을 두고 한국인 사이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을 법도 합니다. '외국인 별장촌'으로 불린 노고단의 이 시설물과 관련하여 지리산 주변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한 듯합니다. 지리산을 소개하는 일부 책에도 외국인 별장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피서용 별장이 50여 채나 서 있었던 이곳, 그 때 키 큰 서양 사람들이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적은 품삯을 벌기 위해 그 사인교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내리던 우리 백성들...'(이종길의 <지리영봉>)

'그 무렵 지리산 사람들은 석유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노고단에선) 발전시설로 전깃불을 밝히고, 예배도 보고, 영화도 상영했다. 그들이 이곳에 오를 때는 대나무 들것을 타기도 했고, 지게에 지고 올랐는데, 들것은 두 사람이 메고 가야 했다. 노고단까지 사람들을 메다 주고 져다나르면 그 때 돈으로 사흘 품삯이 되는 1원을 버는 편이라 바쁜 농사일을 미뤄두고 품팔이에 나섰던 구례 농부들...'(김경렬의 <다큐멘터리 지리산> 2권)

그렇다면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정식 명칭은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이었습니다. 이 땅에 찾아와 복음을 전파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신앙교육과 수련을 하는 성소였지요. 이 수양관 관련 시설물들은 변요한(프레스톤) 선교사의 책임하에 조선총독부와 영구 임대계약을 맺고 세운 것으로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의 경건한 수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군요.

서양 선교사들이 왜 하필이면 지리산 주능선상인 노고단 그 높은 곳에 수양관 건물들을 세운 것일까요? 거기에는 그들로선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할 아주 절박한 문제가 있었답니다. 서양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여름철만 되면 이 땅의 풍토병, 특히 수인성 질환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었다는 군요. 말라리아와 세균성 이질 등은 농촌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펴던 선교사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나 봅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풍토병에 따른 희생이 아프리카의 그것보다 더 극심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풍토병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선교부 철수까지 검토했다는 군요. 풍토병으로 선교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유진 벨 선교사가 여름철에도 기온이 낮은 노고단 피양을 제안했고, 선교사들은 대체 주거지 개념으로 수양관을 조성했답니다. 흔히들 말하는 '별장'과는 그 개념이 다르지요.

호남지역 농촌마을에서 복음전파와 봉사활동을 펴던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자세는 높이 평가되고 있지요. 또한 그들 중 상당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봉사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노고단에 올랐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환자나 노약자는 걸을 수가 없어 가마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품삯을 넉넉하게 지급했다면 도리를 다한 거지요.

노고단의 이 선교 유적지는 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참담한 폐허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건물이 불타고 그 잔해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6.25 이후에는 휴 린튼(한국명 인휴, 印休) 선교사와 조 요셉 목사 등이 이곳에 천막을 치고 여름 수양회를 열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노고단 수양관 복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요. 인요한의 아버지 인휴는 노고단 대신 왕시루봉에 제2의 선교사 수양관을 만들게 됩니다.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