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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마당>최화수의 지리산산책

최화수 프로필 [최화수 작가 프로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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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1506미터의 노고단에 40평의 단층 '노고단산장'(무인산장)이 세워진 것은 1971년이지요. 우종수의 구례 연하반산악회(지리산산악회) 등이 벌였던 지리산 국립공원 지정운동이 1967년 결실을 맺었었지요. 노고단산장도 지리산이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받은 데 따른 하나의 부수적 경사라할까요. 무인산장으로 폐가처럼 버려진 것을 고쳐 함태식 관리인이 입주한 것이 한 해 뒤인 1972년이었습니다.

노고단에는 나라에서 세운 이 노고단산장보다 무려 반세기를 앞질러 선교사들의 수양관이 들어섰답니다. 이른바 '외국인 별장' 또는 '외국인 별장촌'이라 불리는 것으로 1920~25년에 걸쳐 교회당 등 무려 49동의 건물이 세워졌답니다. 일제(日帝) 강점기의 암울한 시대, 도로도 차량도 없었던 그 시절에 어떻게 그 높은 곳에 그 많은 건물을 세울 수 있었는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코도 크고 키도 큰 서양인들이 노고단 고원에 별장을 지어 무더운 여름철에도 시원하게 지내는 것을 두고 한국인 사이에는 이런저런 말이 많았을 법도 합니다. '외국인 별장촌'으로 불린 노고단의 이 시설물과 관련하여 지리산 주변 마을 사람들 사이에도 비판적인 시각이 우세한 듯합니다. 지리산을 소개하는 일부 책에도 외국인 별장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가 실려 있기도 합니다.

'피서용 별장이 50여 채나 서 있었던 이곳, 그 때 키 큰 서양 사람들이 사인교(四人轎)를 타고 산을 오르내리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적은 품삯을 벌기 위해 그 사인교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르내리던 우리 백성들...'(이종길의 <지리영봉>)

'그 무렵 지리산 사람들은 석유 호롱불을 켜고 살았는데, (노고단에선) 발전시설로 전깃불을 밝히고, 예배도 보고, 영화도 상영했다. 그들이 이곳에 오를 때는 대나무 들것을 타기도 했고, 지게에 지고 올랐는데, 들것은 두 사람이 메고 가야 했다. 노고단까지 사람들을 메다 주고 져다나르면 그 때 돈으로 사흘 품삯이 되는 1원을 버는 편이라 바쁜 농사일을 미뤄두고 품팔이에 나섰던 구례 농부들...'(김경렬의 <다큐멘터리 지리산> 2권)

그렇다면 노고단의 '외국인 별장촌'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정식 명칭은 '한국 주재 선교사 수양관'이었습니다. 이 땅에 찾아와 복음을 전파하던 서양 선교사들의 신앙교육과 수련을 하는 성소였지요. 이 수양관 관련 시설물들은 변요한(프레스톤) 선교사의 책임하에 조선총독부와 영구 임대계약을 맺고 세운 것으로 한국인 교회지도자들의 경건한 수련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는군요.

서양 선교사들이 왜 하필이면 지리산 주능선상인 노고단 그 높은 곳에 수양관 건물들을 세운 것일까요? 거기에는 그들로선 생사의 갈림길이라고 할 아주 절박한 문제가 있었답니다. 서양 선교사와 그 가족들은 여름철만 되면 이 땅의 풍토병, 특히 수인성 질환에 속수무책으로 희생되었다는 군요. 말라리아와 세균성 이질 등은 농촌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펴던 선교사들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나 봅니다.

한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풍토병에 따른 희생이 아프리카의 그것보다 더 극심했다고 합니다. 선교사들은 풍토병을 피해 일본으로 피신하거나 선교부 철수까지 검토했다는 군요. 풍토병으로 선교의 맥이 끊길 위기에 처하자 유진 벨 선교사가 여름철에도 기온이 낮은 노고단 피양을 제안했고, 선교사들은 대체 주거지 개념으로 수양관을 조성했답니다. 흔히들 말하는 '별장'과는 그 개념이 다르지요.

호남지역 농촌마을에서 복음전파와 봉사활동을 펴던 초기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자세는 높이 평가되고 있지요. 또한 그들 중 상당수는 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대대로 봉사활동을 펴오고 있습니다. 그들이 한국인이 메는 가마를 타고 거들먹거리며 노고단에 올랐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다만 환자나 노약자는 걸을 수가 없어 가마에 의존했다고 합니다. 그런 경우에도 품삯을 넉넉하게 지급했다면 도리를 다한 거지요.

노고단의 이 선교 유적지는 저 한국전쟁을 전후하여 참담한 폐허로 바뀌게 됩니다. 모든 건물이 불타고 그 잔해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지요. 6.25 이후에는 휴 린튼(한국명 인휴, 印休) 선교사와 조 요셉 목사 등이 이곳에 천막을 치고 여름 수양회를 열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노고단 수양관 복원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요. 인요한의 아버지 인휴는 노고단 대신 왕시루봉에 제2의 선교사 수양관을 만들게 됩니다.

<다음 칼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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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메 2003.12.12 13:19
    지리산에 남아있는 수많은 역사속에 녹아있는 사실중에서 '선교사 수양관'에 얽힌 일도 의미깊은 일화가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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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허바다 2003.12.12 20:30
    덕분에 또 한모퉁이의 지리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들이 힘들게 피난을 온 것이군요.. 선교사가 정말 그랬을까 하는 의구심과 함께 너무 일방적인 주장에 의해 매도 당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었는데.. 역시 그러한 이유가 있었군요... 정말 바로 안다는 것이 그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정신 차려 다시 한번 새겨 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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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전 2003.12.12 20:33
    구례에 화엄사가 있어 99%가 불교인데 한집만이
    교회신자라 그집 아저씨가 선교사들과 지게꾼들을 연결시켜 주었다고 합니다. 그집에게 잘보여야
    지게꾼일도 할 수 있었다고 해요. 그날 하루벌이가
    일년벌이와 비슷했으니까요. 지게에 탈 사람들을 저울로 잰 후 그 무게에 따라 돈을 차등지급했답니다. 지게에 탄 사람들이 환자, 노약자였는지 아니면
    보통 사람들도 지게에 탔는지에 대해선 추측이 아닌 좀더 확실한 고증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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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거사 2003.12.12 22:59
    선교사들이 만리타국에 휴양하러 온 것은 아닐터.지리산 노고단에 수양관 세운 것인가,별장 세운 것인가는 종교의 사명감 감안할 때 짐작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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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전 2003.12.13 17:28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철수 하려던 때가
    청일전쟁(1894~1895) 때였죠. 당시는 제국주의 시대. 서구 열강들은 제국주의 침략에 자국의 종교도
    이용하였습니다. 이른바 간접 유화-위무책.
    자세히 설명 안드려도 잘 아실 것입니다.
    당시 선교사들은 교묘히 위장된 침략통치자였습니다. 순수한 성직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100%의 선교사가 그러지는 않았겠지요. 저는 종교계의 의료선교, 스포츠선교 등을
    싫어합니다. 목적이 순수하지 않기 때문이죠.
    충분한 댓가를 받았다고는 하나 우리나라 백성이
    생활고에 못이겨 그런일을 했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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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 해 봉 2003.12.14 01:47
    지금부터 80여년전에 선교사들의 수양관이 49동이나 세워져 있었다니 침으로 놀랍습니다.
    그시절에 그많은 자재들을 얼마나힘들게 땀흘리며 그산꼭대기까지 운반하였을까요.
    이종길의 지리영봉.김경렬의 다큐멘타리 지리산.
    월전님의글등 좋은공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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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 2003.12.15 22:26
    저도 놀랐습니다. 지리산에는 참으로 많은 역사를 안고 있다는걸 새삼 느낍니다. 수백년 전부터 자국의 산하를 지키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관리하는 일부 서방의 사례에 비춰보면..위의 선교사들은 조선땅을 우습게 봤을지도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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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해 2003.12.16 04:51
    근대 서구제국주의의 동양권 틈입을 위한 이념 키워드로써의 선교의 작동은 역사적 사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국과 미제국주의가 엄연히 다르듯, 제국주의 관리자들에 의해 장치된 선교전략과 이땅을 오르내린 선교사들의 선교 또한 구별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초기 제국주의 첨병 역할을 했다는 일반적 인식과 동시에 한반도에 있어서의 특수한 양상 또한 조명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성경보급으로 인한 조선민중들의 한글활용 확대나 교육사업 등등은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물론, 선교사들의 폐해 또한 없을 수는 없습니다. 각설하고, 역사는 오늘이라는 지평에서 과거를 가늠하고 재평가하기 마련입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과거의 외래종교가 정신과 문화의 중심에 굳건히 구축되어있으며 이미 깊숙히 토착화한 신앙이기도 합니다. 과거와는 그 주체라든가 성격이 완연히 다릅니다. . . 이러한 전제 하에서, 글의 맥락과 의미에 다가서고자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아무튼, 저 또한 이전에는 가마를 타고 올랐다는 과거사에 갇히고 민족적 자존심에 얽매여 막연하고 일방적 이해 수준에 머무르고 있었습니다만, 칼럼글을 읽으면서 다양한 관점을 마련하고 사유를 시도합니다. 이 땅에 깊이 뿌린 내린 종교가 있다면, 역사의 흔적들은 그 근거를 지니고 의미를 생성하고 재구성하기 마련입니다. 린튼 일가의 족적과 동정론을 넘어서서 별장촌이 아니라 선교사수양관촌으로 역사적 의미를 담보한다면, 인식과 수용이 달라질 가능성이 많다고 봅니다. 또한, 그러함으로써 지리산의 역사 속에서도 근거를 지니고 존재할 수도 있습니다. 지리산에 존재하는 역사와 흔적의 소멸을 앞에 놓고, 판단은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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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교사터지기 2004.05.18 14:08
    선교사유적지(노고단, 왕시루봉)에 대한 부가 설명입니다.
    **지리산 선교사유적지(노고단, 왕시루봉)의 역사적 배경***
    1895년 유진벨 부부를 비롯한 몇 명의 미남장로교 선교사들은 몇 달에 걸친 여정 끝에 부산을 거쳐 제물포를 통해 이 땅에 도착했습니다. 유진벨 목사는 여러 가지 환경이 어려운 호남지역에서 선교를 시작하라는 미남장로교의 권유에 따라 3년간 서울에서 언어훈련을 받으며 선교사역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동안 유진벨 목사는 구한말의 긴박한 세계정세와 조선의 위태로움을 직접 경험하게 되었고, 고종을 보호하기 위해 불침번을 서기도 하였습니다. 1898년 유진벨 목사 부부는 전남 목포에 초대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그 후 복음 전파는 물론 교육, 보건의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1912년 미남장로교에서 독신으로 파송된 윌리엄린튼(후에 유진벨의 사위가 됨)도 평생을 교육에 몸바친 선교사였습니다. 이렇게 미남장로교에서 세운 대표적 교육기관은 순천의 매 산학교, 목포의 정명학교, 광주의 숭일학교, 수피아 여학교, 전주의 기전여학교, 신흥학교 그리고 6.25 이후에 세워진 대전의 한남대학교가 있으며, 의료기관으로는 순천의 알렉산더 병원(현재는 없어짐), 기독결핵재활원, 광주기독병원, 전주예수병원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초기 선교사들이 부딪힌 장벽 중 가장 넘기 힘든 것은 질병과의 싸움이었습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말라리아, 세균성이질, 학질 등에 의해 선교사 들이 너무 쉽게 쓰러져 갔습니다. 유아 사망률이 아프리카 수준을 넘었으며, 미남장로교 선교부에서는 너무나 큰 희생 때문에 한국에서의 철수를 고려할 단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유진벨 목사의 첫 번째, 두 번째 부인이 돌아가신 것도 그 단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1915년 유진벨 목사는 선교사의 철수보다는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기인 6월말부터 9월 말까지 저온지에 피해 있다가 다시 복귀하는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당시 통치기관인 조선총 독부에 지리산 노고단에 대한 영구임대 계약을 맺고 1920년부터 교회겸 숙소를 비롯한 50여채의 집을 건축하였습니다. 그때부터 노고단의 수양관은 선교사들의 생명을 보존시켜준 피난처로, 그리고 선교활동을 위한 재충전의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이곳은 예레미아서를 제외한 구약성경 38권의 개역 작업의 터전이었으며, 선교사들의 초교파적 교육과 청교도적 단합수련 장소, 더 나아가 한국교회 지도자 수양회 장소로써 활용되었습니다.

    이 수양관은 미남장로교에서 운영하던 학교들의(특히 전주의 신흥, 기전) 신사참배 반대 로 인해 폐교되어, 유진벨 목사의 사위 윌리엄린튼 교장이 잠시 한국을 떠나기 전인 1939년까지 린튼교장에 의해 관리되었습니다. 해방 후 선교사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노고단 수양관의 건물 소유권을 재 인수받아 6.25전까지 사용하였습니다. 현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많은 건물들이 파괴되어 당시 교회건물의 벽 일부와 굴뚝 그리고 집터들만 남아 있습니다. 유진벨 목사의 외손자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했던 휴 린튼 선교사와 조요셉 목사등은 50년대 말까지 노고단 수양관 집터에 텐트를 치고 여름 수양회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노고단이 천왕봉까지 이르는 지리산 등산로의 입구가 되어 수양관의 원래 목적이 부적절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 지리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이후 인휴(Hugh M.Linton) 선교사가 교통사고로 갑자기 소천한 1984년까지 왕시루봉 수양관은 연습림과 긴밀한 관계 를 가지며 전나무, 잣나무 등의 식목과 산림보호에 크게 이바지했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www.km1895.or.kr 에서 참조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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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지기 2005.02.25 23:14
    난 인요한이라는 사람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떠는 사람입니다.
    같은 동네에서 살아 온 한 사람으로서 저들이 한국사람들을
    어찌 대했는가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먼저 오가야 할 것입니다.
    난 저들이 선교를 가장한 또 다른 침략자라고 하고 싶습니다.
    언젠가 김동건씨가 진행하는 한국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유창하게 순천사투리를 쓰는 그를 본 순간 치를 떨어야 했습니다.
    고향에 친구가 있다니?
    그 친구가 정말 어려서부터 사귄 친구인지 묻고 싶습니다.
    물론 있겠지요?
    다만 그들이 현재 순천에 사는 제법 성공한 인사들이라고 하더군요.
    그들이 어린시절을 같이 보낸 친구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마치 유년을 한국사람들과 격없이 지낸 것처럼 포장하는 가증스러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한국사람들과 거리를 두면서 군림했던 침략자들입니다.
    그들의 집 앞을 걷기도 무서울 정도였습니다.
    그들이 무슨 구세주인양 떠드는 걸 보니
    참 기독교인들 답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어려서 보았던 인요한 오누이는 그저 침략자 미국인일 뿐이였습니다.
    여기서 왜 저들이 특별한 사람으로 포장되어져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군요.
    지리산에 저들의 시설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지리산을 위해서
    민족의 정기를 위해서라도 치유되어야할 생채기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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