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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한 치의 방심도 허락하지 않는 길의 텃세
제6절 남자 넷에 닭 한 마리?

 

지리한 임도를 따라 내려오는 동안 베이스캠프지기한테서 전화가 왔
다. 힘들 텐데 오늘 영양 보충이라도 하자고. 퇴근길에 들렀다 간단다.
어제 막걸리 배달 못 해 준 게 못내 걸리는 모양인데 사실이 밝혀지면 큰
일이지만 어쩌나, 집 떠난 과객에게 염치는 호사다. 나는 이미 충분히
뻔뻔해지고 있었다. 예약한 민박으로 즉시 전화했다. 오늘 아침까지 뛰
어다니던 동네에서 제일 큰 장닭 한 마리 삶으라고. 똥집도 반드시 있어
야 한다고. - 이건 팁이다. 이제는 토종닭도 대량으로 키워 포장해서 판
다. 이런 포장육에는 절대 똥집이 없다. 직접 잡은 닭인지 확인하는 가
장 간단한 방법 하나. 똥집! 똥집만 따로 사서 넣지 않는 한 달리 방법이
없다. 더구나 시골에서 똥집을 따로 사는 것은 닭 한 마리를 더 잡는 것
보다 몇 배 어렵다.

 

지루한 임도를 걷다 보니 이 산은 무슨 연유인지 드물게 벌거숭이다. 여
기저기 채벌(?)한 나무들이 나뒹굴고 있는데 어린 묘목들은 식재(植栽)
일자들을 이름표처럼 달고 있다. 아마 이곳 토양과 기후에 맞는 수종을
찾는 모양이다. 이 곳에서도 응달진 계곡에는 두꺼운 얼음과 그 얼음 위
에 쌓인 눈이 아직도 겨울이 살아 있음을 외치고 있다. 얼음 아래로 흐
르는 물을 한 잔 받아 마시니 시원하기 그지없다. 이 얼음과의 이별은 5
일 뒤인 3월 16일 형제봉에서였다.

 

탑동 마을
속세와의 인연을 끊는다는 뜻을 담은 단속사(斷俗寺) 폐사지(廢寺址)가
있다. 보물인 두 개의 석탑과 당간이 그 옛날 웅장했던 시절을 대변한
다. 탑과 당간이 저 정도 규모면 아마 그 시절에는 이 마을 전체가 절터
이었을 거다. 전체 둘레길 경로에서 접하는 거의 유일한 제대로 된 문화
재이다. 이런 부분도 좀 감안해서 경로를 조정하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유물을 통해 옛사람들의 숨결을 느껴 보는 것도 느린 여행의 큰 즐거움
이 아닐까? 당간 주변에는 적송 몇 그루를 비롯해 노송들이 한껏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런 장면을 접할 때마다 가지게 되는 의문 하나. 원래 저
런 소나무들이 많은 곳에 절간이 들어섰을까 아니면 절에서 심은 나무
들이 저렇게 잘 자란 것일까? 거의 예외 없는 모습이다.

마을에 도착해서는 늘 그랫듯이 민박으로 전화를 건다. 마을은 거의 다
지나쳐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점심도 건너뛰었고 바람은 차고,
춥고 배고프면 거지라는데… 마을 회관 앞 가게는 잠겨 있고, 하릴없이
마을 입구 주차장에서 시간을 보낸다. 30분 동안 수 차례 전화를 해도
무응답. 이 순간 기획 담당은 또 불안해진다. 혹시 영 통화가 안되면 어
쩌지. 하는 수 없이 어제 이 집을 소개한 게스트하우스에 전화를 건다.
유선 번호라도 없느냐고 물으니 둘레길 표지를 따라 계속 1km쯤 전진
하란다. 다행이다. 역방향이거나 노선에서 벗어나면 재앙인데 내일 구
간 가불이다.

 

양뻔지 민박. 이름부터 특이하다. 무슨 뜻인지 물었고 답변을 들었으나
친가, 외가 모두 최소 3대 이상 같은 언어권인 가야권에서 살아온 나로
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의미의 이 지역 사투리로 대충 ‘양쪽으로
넓은 벌’ 정도의 뜻으로 알아듣는 척 하고 넘어 갔다. 전형적인 농가. 넓
은 마당에 한 쪽으로는 울도 담도 없다. 지금은 염소 세 마리와 개 한 마
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소를 키우던 텅 빈 축사, 방 한 칸에 부엌이
붙은 살림집 그리고 방이 2개 있는 민박용 건물로 구성되어 있다. 샤워
장은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 옆 가건물에 있다. 겨울이면 많이 춥지 싶어
굳이 상, 중, 하로 평가하자면 시설도 「중」, 음식도 「중」 수준이다.

수 차례 전화를 해도 안 받아서 걱정했다, 배가 고프다, 라면이라도 없냐
고 물으니 할머니께서 아주 미안해 하신다. 민박을 운영하시는 분의 친
정어머니시다. 점심 때 다른 여행자가 찾아와 라면 하나 끓여 달라고 해
서 끓여 주고 이제 2개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떡국 떡을 넣어 빨
리 끓여 주시겠다고 하신다. 따로 돈은 받지 않겠다고 덧붙인다. 세탁기
돌리고 셋 모두 몸을 씻고 오니 배불리 먹을 수 있을 만큼 끓여 오셨다.
이미 오후 4시를 넘어서고 있는데 점심도 저녁도 아니다. 할머니는 계속
혼잣말을 하시는데 대충 딸이 못내 성에 안 차시는 모양이다.

 

해질 무렵 함양에서 출발한 친구가 마을 어귀에 도착해 전화를 해 왔
다. 정보화 수준이 상당히 떨어지는 이 친구 BMW에 장착된 내비게이
터가 무용지물이다. 차근차근 길을 일러 주고 가만히 생각하니 우리가
걸어 왔던 그 길이 과연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인지 의심이 되어 결국 마
을까지 1km 남짓을 걸어가서 친구를 만나 걸어 들어온 길이 아닌 다른
길로 민박에 당도했다. 만 3일만에 길에 대한 개념이 바뀐 거다. 차가
다닐 수 있는 길에서 사람이 걸을 수 있는 길로. 인간은 역시 환경 적응
이 빠른 동물이다. 이제 도시에서 차가 다닐 수 없는 골목길은 거의 사
라졌다.

떡하니 한 상이 차려졌다. 아침까지 활발하게 뛰어다니던 이 동네에서 가
장 큰 장닭. 똥집도 있다. 그런데 좌중의 눈길이 전부 나한테로 모인다.
“한 마리?”
“응”
“에라이…”


스스로도 이해하기 어렵다. 내가 한 마리라고 굳이 숫자를 정확하게 밝
혔는지 기억이 없다. 성인 남자 4명에 닭 한 마리. 여하튼 그 큰 장닭 –
이미 삶은 놈을 두고 성별을 확인할 길은 없다. - 한 마리로 네 명이 싸
워 가며 포식(?)했다. 기획 담당은 늘 어렵다. 이런 실수에도 불구하고
나에게도 닭고기를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준 친구들은 천사다. 이 ‘한 마
리’ 사건은 두고두고 나의 소박함과 무감각의 증거가 되어 아주 오랫동
안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 뭔가를 잔뜩 들고 왔다. 산타 선물 보따리를 푸는데 초
코바 두 박스, 진미오징어포 한 봉지 그리고 옥수수 뻥튀기가 줄줄이 나
온다. 비상식량이란다. 초코바 두 박스는 서로 종류가 달라서 이유를 물
으니 자기는 이런 것 안 먹기 때문에 뭐가 맛있는지 자신이 없어 두 종류
를 샀단다. 이런 마음을 일러 배려라 한다. 그리고 옥수수 뻥튀기는 할
머니 환자분이 놓고 간 뇌물이란다. 눈물겹게 고마운 순간이다. 이 착한
의사는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 반나절 정도 시간을 내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분들 왕진을 다닌다. 늙은호박 한 통을 들고 와서는 수액을 놓아 달
라는 분, 김장철이면 손수 담근 김장 가져 오시는 분, 장날이면 병원 문
이 열리기를 기다리면서 병원 앞 계단에 걸터앉아 채소를 다듬는 분 등
등 다양하단다. 그래서 장날은 요일을 불문하고 반드시 병원문을 연다.
참 착한 의사고, 참 고마운 친구다. 이 초코바 두 통은 여행을 마칠 때까
지 긴요한 비상식량 역할을 톡톡히 했다.

 

 

https://www.facebook.com/baggsu/posts/18903219411956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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